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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부상이 기회가 됐다…들켜버린 발레리나의 속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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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2호 19면

[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유니버설발레단 신작 ‘더 발레리나’

육중한 커튼이 내려진 무대 안쪽, 어떤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까. 발레 공연을 보러 온 관객은 막이 열리기 전 프로그램 북을 뒤적여 작품의 배경과 줄거리를 찾아보거나 발레의 마임을 학습하곤 한다.

그런데 막을 활짝 연 채 관객을 맞는 발레가 탄생했다. 객석에 앉아있으면 무용수들이 연습실 세트에 레오타드 차림으로 하나둘 나타나 몸을 풀고, 발레 마스터가 등장해 클래스를 진행한다. 자기 옷과 소품을 그대로 드러낸 ‘본체’에 가깝다. 베일을 걷고 발레 공연의 실체를 공개하겠다고 작정한 유니버설발레단의 신작 ‘더 발레리나’다.

현실감 살리려고 대사도 입혀

왼쪽부터 드미 솔리스트 김채리, 수석무용수 강미선, 솔리스트 한상이. 정준희 기자

왼쪽부터 드미 솔리스트 김채리, 수석무용수 강미선, 솔리스트 한상이. 정준희 기자

마치 인상파 화가 드가의 그림처럼 발레 연습실을 몰래 엿보는 것 같다. 매일 클래스를 하고, 리허설 도중 부상을 당해 급하게 배역이 바뀌고, 실제 공연이 펼쳐지는 무대와 백스테이지에서 마음 졸이며 응원하는 동료들, 예쁘게 인사하고 들어가 헉헉대며 쓰러지는 모습까지. 그야말로 하나의 공연을 올리기 위한 우여곡절을 빼곡히 담아낸다. 우아하게만 보이는 백조의 수면 아래 ‘발버둥’이랄까.

2005년 유니버설이 공연했던 크리스토퍼 휠든의 ‘백스테이지 스토리’에 영감 받았지만, 대사를 하면서 리얼하게 클래스를 진행하고 문훈숙 단장이 작품 속으로 들어가 해설자 역을 맡는 등, 유니버설만의 개성을 살린 무대다. 발레단이 최초로 하남, 군포, 고양, 영덕, 경남 등 5개 지역 문예회관과 공동제작을 시도한 작품으로, 19~20일 하남문화예술회관을 시작으로 9월 말까지 전국을 돈다.

발레리나의 ‘민낯’을 보여줄 수석무용수 강미선(39), 솔리스트 한상이(37), 드미 솔리스트 김채리(32)는 각각 연습 도중 부상을 당한 프리마 발레리나, 대신 주역을 꿰차는 신입단원, 극중극 공연의 솔리스트 역을 맡았다. 리허설 도중 만난 세 사람은 “신입 시절이 생각나 초심으로 돌아가게 되는 공연”이라고 입을 모았다. “신입이 뒤에서 주역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마음 품는 건 모든 발레리나가 똑같을 걸요. 겉으로 내비치지 않아서 그렇지 저도 그런 마음이었는데, 그런 속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은 작품이라 애착이 가요. 인간극장 발레리나 편을 보는 느낌이랄까요.”(강)

17일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하남문화예술회관 대극장에서 '더 발레리나' 드레스 리허설이 진행되고 있다. 정준희 기자

17일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하남문화예술회관 대극장에서 '더 발레리나' 드레스 리허설이 진행되고 있다. 정준희 기자

이들은 “새로운 형식이라 클래식 작품보다 준비과정이 몇 배로 힘들다”고 했지만, 삶의 90%를 몸담고 있는 발레단의 일상 자체가 소재인 만큼 공감도 몇 배다. “공연 준비란 건 예측불허예요. 공연 당일 캐스팅이 바뀌어 관객이 갑자기 공지를 받기도 하는데, 그런 상황이 왜 발생하며 그때의 내부적인 혼란까지 보여주는 작품이라 재미있어요. 항상 맡은 역할 외에도 할 수 있는 준비가 돼 있어야 하죠.”(김) “‘쇼 머스트 고온’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우리 사정으로 공연을 취소할 수는 없으니 누구든 갑자기 투입되어도 관객을 만족시킬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해요. 워낙 공연 수가 적으니까 실제로 어린 단원들은 그런 상황에서 기회를 잡아야 하죠.”(한)

17일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하남문화예술회관 대극장에서 '더 발레리나' 드레스 리허설이 진행되고 있다. 정준희 기자

17일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하남문화예술회관 대극장에서 '더 발레리나' 드레스 리허설이 진행되고 있다. 정준희 기자

프리마 발레리나의 부상으로 신입이 전격 발탁된다는 건 다소 만화적인 설정이지만, 부상과 친한 사이인 무용수들이라 ‘대타’의 경험은 누구나 있다. “작년에 ‘지젤’ 공연 당일 오후에 갑자기 수석무용수가 골반 이상으로 못하게 되어서 제가 투입됐어요. 스타일이 전혀 다른 파트너와 딱 한번 맞춰보고 무대에 서게 된 그날의 긴장은 잊을 수가 없죠. 근데 생각보다 잘됐어요. 다 내려놓고 하늘에 맡겨서 그런가 봐요.(웃음)”(한) “저도 ‘지젤’ 1막에 다친 무용수를 대신해 2막에 급히 역할을 바꾼 적이 있어요. 2막 시작을 늦출 수 없으니 인터미션 때 모든 사람이 저에게 달려들어 분장을 도와주고, 저는 순서만 빨리 외우고 나가서 언니들이 속삭여주는 대로 움직였죠. 인터미션 20분 안에 모든 게 이뤄진 건데, 하고나서 긴장이 풀려서 울어버렸어요. 저때문에 망칠까봐 손발을 달달 떨면서 그야말로 ‘백조의 발버둥’을 쳤는데, 정말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네요.(웃음)”(김)

유니버설 발레단 신작‘더 발레리나’는 공연을 준비하는 발레단의 일상을 고스란히 무대로 올렸다. 가운데는 발레 마스터 역을 맡은 수석무용수 이현준. 정준희 기자

유니버설 발레단 신작‘더 발레리나’는 공연을 준비하는 발레단의 일상을 고스란히 무대로 올렸다. 가운데는 발레 마스터 역을 맡은 수석무용수 이현준. 정준희 기자

후배들의 긴장감 넘치는 무용담을 들으며 ‘수석’ 미선은 엷은 미소만 짓는다. “언니는 언제 어떤 역을 대신 맡아도 믿음직하게 하는 사람”(한, 김)이라 ‘대타’ 경험도 가장 많기 때문이다. 입단 20년차 최고참인 그는 연수단원부터 모든 단계를 거쳐 수석에 오른 입지전적 존재인데, 결코 쉬지 않는 연습벌레로 유명하다. 결혼도 같이 열심히 연습하던 파트너(수석무용수 콘스탄틴 노보셀로프)와 했을 정도다. 10개월 된 아기엄마지만, 임신 중에도 쉬지 않고 몸을 풀었기에 출산 4개월 만에 복귀할수 있었단다.

“어렸을 때는 휴가에도 안 쉬었어요. 놀러도 안가고 계속 나와서 혼자 연습했죠. 좀 쉬면 뒤처질까 불안하고, 가진 게 없어질까봐 무서워서 못 쉬었는데, 돌아보니 그렇게 얽매인 일상이 스스로 안쓰러워요. 이제 어린 친구들 보면 좀 쉬라고 하고 싶어요. 쉬어야 새로운 기분으로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강)

17일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하남문화예술회관 대극장 연습실에서 '더 발레리나' 드레스 리허설을 마친 김채리(왼쪽), 강미선(가운데), 한상이(오른쪽) 발레리나가 무대 뒤 숨겨진 무용수들의 노력과 사연 등을 이야기했다. 정준희 기자

17일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하남문화예술회관 대극장 연습실에서 '더 발레리나' 드레스 리허설을 마친 김채리(왼쪽), 강미선(가운데), 한상이(오른쪽) 발레리나가 무대 뒤 숨겨진 무용수들의 노력과 사연 등을 이야기했다. 정준희 기자

“일상이 발레단이라 놀 때도 발레단 사람들과 논다”는 이들에게 불만은 없어보였다. 자고로 ‘리나’란 발레를 위해 태어나는 걸까. “회사원들은 직장 밖 생활도 있지만 우리는 발레만 보고 있는 느낌은 있어요. 생활의 90%가 발레단이고, 나머지는 재활치료다 보니 생활 반경이 좁죠. 근데 스스로 이걸 즐기는 것 같아요. 어느 순간 그만두고 매일 하던 클래스, 리허설을 안하게 된다면 얼마나 공허할까요.”(한) “발레만 해서는 잘할 수 없으니 밖에서도 다른 운동을 하고, 다음날 연습을 기분좋게 잘하려면 집에서도 작품생각을 하며 몸관리를 해야 하죠. 매일 한 두시간씩 토슈즈 꿰매는 것도 작품에선 못보는 ‘찐 일상’이예요. 하루에 몇 개씩 신는 토슈즈를 자기 발에 맞게 다듬느라 연습실에선 다들 바느질하고 있죠.(웃음)”(김)

17일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하남문화예술회관 대극장에서 '더 발레리나' 드레스 리허설이 진행되고 있다. 정준희 기자

17일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하남문화예술회관 대극장에서 '더 발레리나' 드레스 리허설이 진행되고 있다. 정준희 기자

5개 지역 문화회관과 공동제작

중력을 거스르는 고난도 동작들을 태연하게 소화하는 미소 뒤에도 나름 비밀이 있는데, ‘발레의 꽃’이라 할 파드되(2인무) 연습 과정도 작품에 담겨 있다. “리프트만 해도 무게보다 호흡이 중요해요. 우리가 위에서 마냥 편한 건 아니고, 들어올려지는 데도 스킬이 필요하죠. 공중에서 숨을 멈추고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호흡을 끌어올려줘야 남자무용수가 편안하게 들어올릴 수 있거든요. 피루엣도 남자가 돌려주면 그냥 돌아가는 게 아니라, 축을 놓치지 않으려면 생각할 게 굉장히 많아요.”(강)

17일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하남문화예술회관 대극장에서 '더 발레리나' 드레스 리허설이 진행되고 있다. 정준희 기자

17일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하남문화예술회관 대극장에서 '더 발레리나' 드레스 리허설이 진행되고 있다. 정준희 기자

발레리나가 가장 많은 박수를 받는 ‘32회전 푸에테’를 할 때는 외로워 보이지만, 혼자만 도는 건 아니란다. 무대 윙에서 단원들이 다같이 한마음으로 ‘끝까지’를 외친다는 것이다. “보통 32회전 푸에테는 공연 마지막에 나오니까 체력이 완전 소진된 상태에서 하게 되거든요. 그게 테크닉인 것 같아요. 몸에 힘도 있어야 하고 중심도 잡아야 하고 어지럽지 않게 초점도 잘 잡아야 하는 고도의 집중력을 체력이 없을 때 발휘해야 하니까요. 끝내고 웃으며 들어가지만 안에서는 휘청휘청 해요.(웃음)”(김)

17일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하남문화예술회관 대극장 연습실에서 '더 발레리나' 드레스 리허설을 마친 김채리(왼쪽), 강미선(가운데), 한상이(오른쪽) 발레리나가 무대 뒤 숨겨진 무용수들의 노력과 사연 등을 이야기했다. 정준희 기자

17일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하남문화예술회관 대극장 연습실에서 '더 발레리나' 드레스 리허설을 마친 김채리(왼쪽), 강미선(가운데), 한상이(오른쪽) 발레리나가 무대 뒤 숨겨진 무용수들의 노력과 사연 등을 이야기했다. 정준희 기자

‘더 발레리나’가 더 주목되는 건 한국문화예술회관 연합회 주최로 5개 지역 문화회관과 공동제작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많은 제작비를 투입해야 하는 순수공연예술 분야에서 수준높은 신작을 개발해 레퍼토리로 정착시키기 위해 예술단체와 공연장의 적극적인 공동제작 트렌드가 조성되어야 할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대중의 수요도 자극해야 한다. 상대적으로 발레를 향유할 기회가 적은 지역 관객들에게 먼저 선보이는 무대인만큼, 작품의 부제 ‘당신에게 건네는 따뜻한 레베랑스 (Reverence·발레에서 존경과 감사의 의미를 담아 관객에게 건네는 정중한 인사)’처럼 조금이라도 더 친숙하게 다가가려 노력했다. 문턱 높은 발레가 꼿꼿한 자세를 풀고 러브콜을 보내는 셈이다.

“멀리서 찾아오셔야 했던 지역 관객들에게 신작을 먼저 선보이게 됐어요. 평소에 발레단 구경 한번 와보고 싶은 분들도 많을텐데, 외부인을 엄격히 통제하는 숨겨진 공간을 엿보는 재미도 있으실 거예요. 스토리를 알아도 마임이나 장면에 대한 공부가 필요한 클래식 작품에 비해 가볍게 오셔도 직관적으로 다 이해할 수 있는 공연이기도 하죠.”(강) “작품에 발레 처음 보러 가면서 걱정하는 남자 관객이 나오는데, 여자친구 대사처럼 단장님이 출연하셔서 해설까지 해주시거든요. 편하게 즐기시면 돼요.”(한) “관객이 즐길 수 있어야 발레단도 발전한다고 생각해요. 많은 분들이 영화나 뮤지컬처럼 흥미를 느끼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니, 발레도 보고 발레리나의 일상도 보러 와주세요.”(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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