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취재 파일] 21세기 산유국과 패권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02호 31면

황건강 경제부문 기자

황건강 경제부문 기자

최근 국내 누적관객수 775만 명을 돌파한 영화 ‘탑건:매버릭’의 배경은 미 공군이 아닌 해군 항공대 조종훈련학교다. 전투기 조종사라면 공군을 떠올리는 한국과 달리 전 세계 바다에 항공모함을 띄워 놓은 미국에선 해군 항공대에서만 3700여대의 항공기를 운용하고 있다. 세계 2위 군사력을 보유한 러시아 공군에 필적하는 규모인데, 이를 위해 지난해 미국 해군이 사용한 국방 예산은 2800억 달러(약 370조원)에 이른다. 같은 기간 중국(약 276조원)과 한국(약 50조원), 일본(약 51조원)의 국방비를 모두 더해야 미 해군의 국방 예산과 비슷한 수준이란 얘기다.

미국이 이렇게 막대한 돈을 들여 바닷길을 지배하려 한 것은 석유가 곧 패권이었기 때문이다. “석유를 지배하는 자는 한 대륙을 지배하고, 통화를 지배하는 자는 세계를 지배한다”는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부 장관의 말대로, 한편으론 통화 패권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페트로 달러 체제(미국 달러로만 석유 대금 결제)를 통해 기축통화로서의 달러의 지위를 공고히 한 것이다. 미국이 세계 금융 패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기축통화인 달러의 위력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달러 패권의 배경엔 석유가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16일(현지시간) 워싱턴 백악관에서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서명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16일(현지시간) 워싱턴 백악관에서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서명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석유의 중요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효율적으로 장악하면서 세계 패권을 손에 쥔 미국이 최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미국의 패권에 중국의 도전이 분명해진 탓이다. 중동 산유국 가운데 변함없는 친미 국가일 것만 같았던 사우디아라비아가 중국으로 수출하는 원유 일부를 위안화로 결제하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란 얘기가 지난 5월 흘러나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16일, 시진핑 국가주석의 사우디 방문에서 이 같은 방안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보도를 내놓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 결제망에서 배제돼 기축통화인 달러 결제가 막힌 러시아로부터 몰래 석유를 들여오고 있다는 소식도 나왔다. 중국은 2015년 국제 위안화 결제 시스템(CIPS)을 만든 이래 꾸준히 달러 패권에 도전한 바 있다. 미국이 회계감독권을 이유로 지난 5월 중국 국유 석유회사 시노펙과 페트로차이나 등을 뉴욕증시 상장폐지 명단에 올린 이유다. 아직 도전자인 중국 입장에선 민감한 자금 흐름을 공개할 수 없는 노릇이라 이들 기업을 자진 상장폐지시키는 것이 국익에 부합하는 결정이다.

‘21세기 석유’인 반도체와 배터리 산업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중국의 약진이 위협적인 수준에 올라서자 이를 막기 위해 미국은 반도체법과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통과시키며 전방위로 압박하고 있다.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도 전쟁 위기감을 키워 대만을 확실히 붙잡아 놓으려는 의도란 해석이 나올 정도다. 중국을 압박하기 위해 ‘반도체 산유국’ 대만으로부터 피아 구분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한국 역시 피아식별의 순간이 그리 머지않을 것이다.

올해 벌어진 미국의 행보가 중국 견제에 집중됐다고 해도 무방한 상황인데 반도체와 배터리 산업에서 손꼽히는 ‘산유국’인 한국 정부의 행보가 보이지 않는다. 첨단산업 지원을 논의해야 할 국회는 정쟁 속에 멈춰섰다. “이대로 가다간 삼성전자를 비롯한 한국 기업들이 미국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란 전문가들의 지적이 더욱 뼈아픈 상황이다. 전 대통령의 자택을 압수수색할 정도로 대립하면서도, 국익을 챙길 땐 단결하는 미국 정치권이 부러울 따름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