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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이 “만주국 국방·치안유지 일본에 위임” 충성 밀약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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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2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40〉

만주국은 미국과 체육 교류가 활발했다. 1934년 9월 만주국 체육연맹 초청으로 신징을 방문한 미국육상대표단과 함께한 만주국 총리 정샤오쉬(앞줄 왼쪽 셋째). [사진 김명호]

만주국은 미국과 체육 교류가 활발했다. 1934년 9월 만주국 체육연맹 초청으로 신징을 방문한 미국육상대표단과 함께한 만주국 총리 정샤오쉬(앞줄 왼쪽 셋째). [사진 김명호]

만주국 설립을 준비하던 일본 관동군은 수도를 어디로 할지 고심했다. 선양(瀋陽), 하얼빈(哈爾賓), 지린(吉林), 세 곳을 놓고 저울질했다. 선양은 중국 내지와 너무 가까웠다. 베이징에서 경봉(京奉) 철도를 이용하면 26시간이 고작이었다. 유사시에 대비할 여지가 없었다. 하얼빈은 내지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약점이 있었다. 오랜 세월 제정러시아와 소련의 세력 범위였다. 수도로 삼기엔 찜찜했다. 지린은 지린성(省)의 성도였지만 도시가 협소하고 교통의 요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갑론을박 끝에 지린성 창춘(長春)으로 결정했다. 이유가 있었다.

지린성 경내의 장백산과 송화강 유역은 청나라 황실의 발상지였다. 청나라 폐제(廢帝) 푸이(溥儀·부의)를 영입해 농락하기가 수월했다. 성 중앙에 위치한 창춘은 인구 13만의 작은 도시였다. 장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광활한 면적에 사람 구경하기 힘들고 땅값도 저렴했다. 교통이 사통팔달이고 정치적 색채도 두리뭉실했다. 송화강이 인근에 있다 보니 수리(水利)와 전력(電力) 공급을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도 풍부했다, 식민지의 정치, 군사,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손색이 없었다.

“왕도낙토 건설하자” 집정선언도 거창

1935년 4월, 일본을 방문한 만주국 황제 푸이. [사진 김명호]

1935년 4월, 일본을 방문한 만주국 황제 푸이. [사진 김명호]

1932년 3월 1일, 일본 내각이 ‘만주국 건립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일주일 후, 푸이가 탄 열차가 창춘에 모습을 드러냈다. 열차가 멎기 전부터 군악대의 환영 음악이 요란했다. 도열한 일본 헌병대의 사열을 마치자 중국 전통 복장과 양복, 화복(和服)을 착용한 환영객들의 만세 소리가 음악을 삼킬 정도였다. 지린성 주석 시차(熙洽·희흡)가 다가왔다. 손으로 일장기 사이에 끼어있는 황룡기(黃龍旗) 든 군중을 가리키며 아부 실력을 뽐냈다. “200년 전 대륙을 석권한 팔기병(八旗兵)의 후예들이다. 20년간 황제 폐하의 강림을 고대한 보람이 있다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3월 9일, 관동군이 얼렁뚱땅 준비한 만주국 집정(執政) 취임식이 열렸다. 일본 측은 남만주철도(滿鐵) 총재를 필두로 관동군 사령관과 참모 전원이 참석했다. 중국 측 참석자는 푸이의 측근과 청조(淸朝)의 구신(舊臣), 몽골 왕공(王公), 동북 군벌, 톈진(天津) 시절 푸이와 황비 원슈(文繡·문수)의 이혼 소송을 담당했던 변호사 등 다양했다. 개국원훈들에게 푸이는 집정이 아닌 황제였다. 머리 조아리고 세 번 절하기를 세 차례 반복한 후, 황색 비단으로 감싼 ‘집정인장’을 헌상했다. 일본인들을 재미있어하며 방관했다. 국무총리 정샤오쉬(鄭孝胥·정효서)가 대독한 ‘집정선언’도 황당하고 거창했다. “오국(吾國)은 도덕(道德)과 인애(仁愛)를 장려해 종족 간의 이견과 국제사회의 분쟁을 제거하고 왕도낙토(王道樂土)를 건설하려 한다.”

앵속에서 아편을 채취하는 만주 꾸냥. 도처에 이런 모습이 흔했다. [사진 김명호]

앵속에서 아편을 채취하는 만주 꾸냥. 도처에 이런 모습이 흔했다. [사진 김명호]

만주국 건국과 창춘의 신징(新京)개명을 기념하기 위해 만철이 설립한 신문의 창간사가 눈길을 끌었다. “일본제국은 북남(北南) 1700Km, 서동(西東) 1400Km에 거주하는 3000만 만주인들을 해방시켰다. 천황폐하의 찬란한 빛을 받은 만주와 만주인들에게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서방세계의 식민지 확장과 소련의 베이징 침공, 난징(南京)에 포진한 국민당의 폭정을 우려할 이유가 없어진 만주인들의 위대한 만주건설을 기대한다.”

황제 소리 들으려 동북 영토·주권 내줘

신징의 일본 관동군 사령부. 사령관은 만주국의 태상황(太上皇)이나 다름없었다. 일본의 만주국 대사도 겸했다. [사진 김명호]

신징의 일본 관동군 사령부. 사령관은 만주국의 태상황(太上皇)이나 다름없었다. 일본의 만주국 대사도 겸했다. [사진 김명호]

취임 이튿날 푸이는 분주했다. 오전에 정샤오쉬가 관동군이 작성한 각료와 성장 명단을 들고 왔다. 얼굴 한번 못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묻고 따질 이유가 없었다. 거의 보지도 않고 서명했다. 오후도 한가할 틈이 없었다. 관동군 사령관과 맺을 조약 중 가장 중요한 밀약(密約) 문구를 직접 작성했다. 내용이 엄청났다. “폐국(만주국)은 국방과 치안유지를 귀국(일본)에 위임한다. 소요 경비는 폐국이 부담한다. 폐국은 귀국 군대가 국방에 필요한 모든 행동을 승인한다. 철도, 항만, 수로, 항공의 관리권과 도로 수축을 귀국 혹은 귀국이 지정한 기관에 위임한다. 폐국은 귀국 군대가 필요하다고 인정한 각종 시설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폐국 참의부는 귀국의 저명하고 식견 있는 인사를 참의로 영입한다. 중앙과 지방 관서의 관리도 귀국인 임명이 가능하다. 인선과 선정은 귀군 사령관에 의존한다. 해직도 귀군 사령관의 동의를 거침이 마땅하다. 장차 양국의 조약 체결 시 위에 열거한 각항의 종지(宗旨)와 규정을 부본(附本)에 명기하고 준수해야 한다.” 이쯤 되면 1년 후 황제소리 듣기 위해 동북의 영토와 주권을 깡그리 일본에 내준 것과 마찬가지였다. 일본 군부는 푸이의 충성에 감복했다. 1933년 5월, 푸이가 바라던 만주국의 제제(帝制) 실행에 동의했다. 황제 등극까지는 또 10개월이 걸렸다.

관동군과 만철이 구상한 만주건설은 자금이 필요했다. 일본은 막부 말년 아편 엄금을 실시해 성공을 거둔 나라였다. 식민지에선 달랐다. 착취를 위해 농민들에게 앵속(罌粟)재배를 권장했다. 만주벌판과 한반도 일부 지역에 양귀비가 만발할 징조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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