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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위안의 묘약, 시와 음식을 ‘창작’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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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2호 24면

이택희의 맛따라기

그의 시와 음식은 생존의 근원과 삶의 원형질에서 캐내는 ‘날것’이다. 고향인 전라도 섬 사투리가 퍼드덕거리며 가슴으로 다가오는 시, 재료의 맛을 잘 살릴 양념의 극소치를 찾느라 골몰하며 빚는 음식. 그렇게 피어나는 한 떨기 야생화다. 이 꽃의 향기는 위로와 위안이라고 요리사는 말한다.

시도 음식도 ‘창작’이라는 그는 ‘단 한 번이라도 식어버린 심장을 예열할 수 있고/ 힘겨웠던 하루를/ 따뜻하게 덖어줄 수 있는/ 음식’을 소망한다(2020년 첫 시집 『민어의 노래』 시인의 말). 올 추석 무렵 나올 두 번째 시집에서는 “자극적인 맛에만 휘둘리고 있다”는 고백과 함께 “이루고야 말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나의 시는 생 날것이거나/ MSG 들어가지 않은 슴슴함으로 가겠다”고 레시피를 밝힌다. 여기서 시는 음식과 동의어일 터이다.

막걸리 식초, 64년 맥 이어온 귀물

주흥이 오르자 시 「여전히」를 낭송하는 김옥종 시인.

주흥이 오르자 시 「여전히」를 낭송하는 김옥종 시인.

그런 ‘작품’을 만나러 지난 5일 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 재뫼마을에 있는 계절 음식 전문 음식점 ‘행복한 밥상 지도로’에 갔다. 지난해 10월 17일 처음 만난 김옥종(53) 시인 겸 요리사와 재회다. 첫 만남 때 우리는 대취했다. 안주가 좋아서, 그의 육성 시 낭송이 흥겨워서 한잔 또 한잔 하다 밤이 이슥했다. 10월의 만남이라 그랬는지 그는 10가지 음식을 준비했다. ▶구운 김을 찢어 올린 낙지 바지락 냉국 ▶담양 칡소 생고기와 낙지 탕탕이 ▶데친 방풍과 낫또를 곁들인 방어회 ▶민물새우 데쳐서 간장에 담근 벼락새비젓(즉석 토하젓) ▶무화과와 지도(智島) 자연산 대하 살을 올린 방울토마토 절임 ▶명란젓에 버무린 아보카도와 손두부 ▶아무 양념도 안 한 참복·까치복 찜 ▶갈치조림 ▶농어 건정 간국 ▶묵은 김장김치와 김장에 통으로 박았던 무.

계절 따라 조금씩 바뀌지만, 이 정도면 그가 자주 차리는 음식을 거의 망라한 셈이다. 절반은 처음 맛보는 낯선 음식이다. 이게 요리 경력 25년 동안 추구해온 그의 창조적 개성이다. 좋은 재료에 집중하고, 그 재료 맛이 살아나도록 양념을 최소화하는 데 조리 초점을 맞춘 결과다. 그 의도는 음식에서 그대로 살아났다. 맛이 순하고 맑다. 먹은 뒤 입과 속은 편하다. 그의 말처럼 ‘위로와 위안의 묘약’ 같다. ‘단짠’이라는 시장의 거센 흐름을 거스른다는 지적을 받기도 할 듯하다.

막걸리를 보충하며 64년째 맥을 이어가는 막걸리 식초. [사진 이택희]

막걸리를 보충하며 64년째 맥을 이어가는 막걸리 식초. [사진 이택희]

음식점에서 내는 메뉴는 세 가지다. 점심에는 어머니가 주방장으로 백반(1인 7000원)을 낸다. 고기 하나를 포함한 10가지 반찬과 밥·국이 나온다. 저녁에는 100% 예약제로 하루 최대 5팀만 받는다. 김 시인이 주방장으로 세트메뉴와 코스요리 두 가지 술상을 차린다. 회무침, 닭볶음탕, 농어 건정 간국으로 구성한 세트는 돈 없는 지역 문인들을 위해 4인 한 상에 5만원만 받는다. 그는 “사실 간국 한 냄비도 제대로 받으면 5만원”이라면서 “그래도 안 온다”고 아쉬워했다.

5~6가지 코스요리는 1인 3만원부터 10만원까지 그날 시장에서 찾아낸 재료에 따라 달라진다. 흔히 ‘오마카세’라고 하는 이 차림은 대개 토마토 절임에서 시작해 농어 건정 간국으로 끝난다. 그 사이에 냉국·회·찜·생선조림 등이 차려진다. 8월 재회 때 코스 음식을 자세히 살피면 다음과 같다.

 새우구이와 무화과를 올린 방울토마토 절임.

새우구이와 무화과를 올린 방울토마토 절임.

▶토마토 절임: 방울토마토를 데치고 껍질 막을 벗겨 수제 맛간장과 숙성한 양파즙을 섞은 소스에 담근다. 소스에 올리브오일과 허브를 넣기도 한다. 잘게 썬 생양파도 살짝 뿌린다. 그 위에 반 가른 생무화과와 껍질을 까서 팬에 구운 대하 살을 올린다. 넉넉히 부어준 소스에 구운 새우와 절인 토마토를 어울려 먹으면 건강해지는 느낌이 든다. 기력이 충전되는 음식을 하겠다고 생각하면서 고안한 음식이다. 음식점 선택의 주도권이 있는 여자 손님을 겨냥했는데 반응이 좋다.

 낙지잡이 기술자였던 어머니의 음식을 발전 시킨 낙지 냉국.

낙지잡이 기술자였던 어머니의 음식을 발전 시킨 낙지 냉국.

▶낙지 냉국: 오이와 사과를 손톱 크기로 얇게 자른 다음 막걸리 식초를 살짝 쳐서 버무려 둔다. 식초가 사과 갈변을 막는다. 동치미국물 얼음과 데쳐 자른 산 낙지를 그릇에 담는다. 준비한 오이와 사과를 그 위에 얹고 열무김치 국물을 붓는다. 열무김치는 국물을 쓰려고 담근다. 음식 이름을 굳이 붙이자면 낙지 냉연포탕이다.

지금은 연륙교를 놓았지만, 섬이던 고향 지도에 살 때는 우물물에 막걸리 식초와 사카린 타고 늙은 오이와 바로 베어온 솔(가는 부추)을 잘게 썰어 넣고 먹었다. 오이와 낙지는 성질이 차고 부추는 뜨거워서 서로 궁합이 맞는다. 어머니는 ‘무덤낙지’ 기술자였다. 무덤낙지는 펄에서 낙지 숨구멍에 무덤 봉분처럼 진흙을 쌓아 놓고, 낙지가 숨 쉬려고 구멍 밖으로 나오려 할 때 얼른 파서 잡는 어법을 말한다. 한번은 서울에서 온 아는 동생이 물회를 해 달라고 해서 냉국이 아닌 시중 물회처럼 만들어줬다. 그러자 “형 음식 베래부렀구마. 왜 형만 가진 가치를 버릴라 그래?”라고 타박했다. 김 시인은 “맛의 가치라는 게 있는데 그걸 놓치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첫 시집 『민어의 노래』 표제작의 소재가 된 민어회.

첫 시집 『민어의 노래』 표제작의 소재가 된 민어회.

▶민어회: 시 ‘민어의 노래’에는 민어 한 마리를 부위별로 다르게 먹는 대목이 나온다. 누구나 군침을 머금게 하는 내용이다. 그날은 여러 여건상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어물전 민어회 접시로 대신했다. 민어 전문 식당을 3년간 운영했던 그가 묵은지에 뱃살 올리고 양념 된장 살짝 찍어 먹어보라고 권했다. 입에 넣고 우물거리자 민어 단맛이 물씬 올라오다가 김치가 품은 감칠맛이 구름처럼 일어났다. 전라도 개미가 이런 맛인가 싶다. 민어의 어떤 부위를 좋아하는지 물었다. 상상도 못 한 답이 돌아왔다. “운동성이 없어 부드러운 뽈살과 입술살, 갯무레기 뱃살”을 꼽았다. 갯무레기는 뱃살 안쪽에 붙어서 내장을 보호하는 길고 붉은 근육(소에 비유하면 업진안살 부위)이다.

반건조 농어와 새우젓으로 끓인 농어 건정 간국.

반건조 농어와 새우젓으로 끓인 농어 건정 간국.

▶농어 건정 간국: 반건조 냉동했던 농어에 얇게 썬 무와 대파·양파 넣고 쌀뜨물 붓고 새우젓으로 간 해서 오래 끓인, 사골국처럼 뽀얀 국이다. 건정은 전남 서남부 해안에서 민어나 농어처럼 큰 생선을 꾸덕꾸덕 말리는 것을 말한다. 간국 맛은 말린 농어 살의 비릿한 바다 내음과 뼈에서 우러난 시원·고소함, 쌀뜨물의 구수함, 새우젓의 감칠맛이 어울려 엮어내는 절묘한 맛이다. 안주로 먹으면 술을 마시면서 해장이 되는 기분이 든다.

한때 조직 행동책·이종격투기 선수

그의 주방을 잠시 둘러보는데 ‘이거다’ 싶은 게 두 가지 눈에 띄었다. 막걸리 식초와 간장이다. 막걸리 식초는 종초(種醋)의 맥을 64년 이어온 귀물이다. 50년 된 걸 얻어 14년째 막걸리를 보충하며 키우고 있다. 간장은 조선간장과 양조간장을 섞어 95도로 가열한 다음 맛을 내는 여러 가지 재료에 부어 우리고, 식으면 다시 95도로 데워 붓기를 6~7회 거듭해 만든다. 꼬박 이틀이 걸린다. 일종의 만능 맛간장이다. 재료를 한꺼번에 넣고 100도로 끓이지 않는 것이 그의 비법이다. 재료를 물었더니 “보통 상상하는 게 다 들어가는데 한번 구워서 넣는다”면서 “파프리카·파인애플도 넣고, 남들과 다르다면 생 돌게(민꽃게)가 많이 들어간다”고 답했다.

청년기는 파란만장했다. 어려서 별명이 ‘아기코끼리’였다. 체격이 크고 힘은 장사였다. 섬에서 중학교 졸업하고 목포의 고등학교로 진학해 1학년 때 조직에 스카우트돼 행동대장 노릇을 했다. 1995년에는 도쿄 ‘K-1 그랑프리 월드’에 닉네임 코리안 타이거(Korean Tiger)로 출전해 국내 1호 이종격투기 선수로 기록됐다. 결과는 KO패로 1회전 탈락. 꺾기만 하다가 난생처음 꺾였다. 거기서 인생이 바뀌었다. 2년 뒤 어머니가 광주에서 하던 선술집 ‘아코식당’에서 칼을 잡고 도마 앞에 섰다. ‘아코’는 아기코끼리의 줄임말이다. 그 사연을 ‘숙명’이라는 시에 담았다. 시인에게 요리는 숙명이다.

이택희 음식문화 이야기꾼 hahnon2@naver.com 전 중앙일보 기자. 늘 열심히 먹고 마시고 여행한다. 한국 음식문화 동향 관찰이 관심사다. 2018년 신문사 퇴직 후 한동안 자유인으로 지내다가 현재는 경희대 특임교수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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