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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한바퀴 둘러만 봐도 세상의 흐름이 보이는 서점이 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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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 조성은의 도서 공간 이야기(3) 

비가 내렸다. 80년 만의 기록적 폭우. 속수무책 현장 상황이 담긴 제보 영상이 뉴스에서 쏟아진다. 재난영화의 한 장면처럼 빗물이 가득한 찬 도심에는 재난불평등이라는 취약한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복구는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이다. 기약 없이. 작년에도 한 달간 비가 내렸다. 잊고 있었던 폭우의 기억과 그 불쾌의 감정이 굵은 장대 빗소리에 다시 소환된다. 코로나 재확산, 최악의 폭염, 가뭄 선포, 산불, 빙하 붕괴로 인한 산사태 등 국제뉴스 또한 경고의 사이렌이 여기저기서 울리고 있다. 지구 위 차트 속 먼 얘기인 줄 알았던 기후문제는 극단적 날씨를 통해 실감한다. 이젠 정말 여지없이 임계치에 다다랐구나.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아 불안하고 위태롭다.

매년 진행하는 서울국제도서전은 그해의 시대상을 담은 어젠다를 메인주제로 발표한다. 올해 테마는 ‘반걸음’으로 나는 메인 주제전의 북큐레이터로서 의미 있는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번 도서전이 나에게 특별한 건 반걸음이라는 주제전 작업을 진행하면서 뉴노멀로 시대로의 변화는 필연임을 직면하게 되었고, 새로운 기준에 대한 필요를 절감했으며, 나의 북큐레이션 작업에도 변화에 기점이 된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다.

맥락으로 드러나는 불평등의 연결고리들

한국의 불평등을 열쇠말로 5개의 대주제 속 26개 세부 카테고리 안에 650권의 선서작업을 마치고 전시 테이블 위에 한자리에 모아 놓고 보니 사회의 민낯들이 그룹별로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해소되지 않은 불평등이라는 물줄기를 따라 한국적 비극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이는 모세혈관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아래로 흐르며 다양한 사회 문제를 비롯해 재난불평등으로 이어지고 있는 모습이 지도처럼 그려졌다. 아! 우리의 삶의 공간은 그야말로 디스토피아가 따로 없구나. 눈으로 거대한 세상의 불평등의 생태계를 확인한 순간이었다.

 2022 서울국제도서전 ‘반걸음’ 주제전 북큐레이션 [사진 조성은]

2022 서울국제도서전 ‘반걸음’ 주제전 북큐레이션 [사진 조성은]

종횡으로 다채로운 책들로 긴장감과 밸런스를 잘 만드는 것이 중요한데, 잘 만든 북큐레이션 책장은 이 작업에 달려있다. 반걸음 키워드에 집중한 책들만 늘어놓는다면 읽기도 전에 읽혀버린 김빠진 책장이 된다. 오늘 비록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견디고 지금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고독과 사유가 담긴 책들을 잘 찾아 이 비극의 카테고리 속에 배치하며 균형을 맞춘다. 신형철 평론가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정원 작가의 『시와 산책』, 권석천 기자의 『사람에 대한 예의』를 예로 들 수 있다. 잃어버린 가치 인간성의 회복, 연대를 위한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단단한 필력으로 호소력 있고 마음을 다해 쓴 인간적 온기마저 느껴지는 이 책들은 잘 읽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새로운 사회 시스템에 대한 필요를 생각케 하는 일석이조의 책이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추천한다.

특히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주제일수록 다양한 관점에서 연계된 책들을 한자리에서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다. 이번 서울국제도서전의 반걸음 부스는 줄이 길었던 부스 중의 하나였고 한자리에 놓고 보니 좋았다는 블로그 속 후기들은 북큐레이션이 가진 편집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정독이 아닌 한 바퀴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아는 세계가 더 깊어질 수도 있고 미지의 세계를 만날 수도 있다. 인식은 확장되고 환기되기 불러일으키는 순기능이 있다. 이 과정에서 책은 도구적 읽기에서 존재의 읽기로 옮겨가며 사회를 읽는 힘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2022 서울국제도서전 ‘반걸음’ 주제전 모습 [사진 조성은]

2022 서울국제도서전 ‘반걸음’ 주제전 모습 [사진 조성은]

일상에서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힘


지금의 서점은 베스트셀러와 신간 중심의 평대 배치와 구간 중심의 서가 배치로의 분리된 진열로 정보들이 존재하나 파편화되어 윤곽을 파악하기 매우 힘든 구조다. 유통사 측면에서 상품의 진열만 강조되고 정보의 제안이라는 플랫폼 측면에서는 기능은 거의 하지 못하기에 시대적 트렌드나 이슈는 알 수 있지만 흐름은 좀처럼 가늠하기 어렵다. 하나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연결된 주제들을 총제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북큐레이션은 서점의 보완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각자도생 위험사회라지만 시민의식은 이번 폭우에도 빛났다. 갑자기 불어나는 빗물에 소중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힘을 합쳐 창문을 깨부수고 생명을 구하는 구조의 손길들, 맨손으로 맨홀에 쌓인 쓰레기를 걷어 올려 물길을 확보하고 비 피해를 줄이는 시민의 노력. 빗소리와 함께 소식을 보는 듣는 내내 뭉클한 감동과 안타까움에 마음이 차올랐던 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위기가 지속되면 일종의 생활양식이 된다’는 브루노 라투르의 말처럼 이내 비는 그치고 우리는 일상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비 피해로 누군가는 어제와 다른 오늘을 고통 속에서 살 것이다. 지구의 내일은 어제 맞이한 오늘과 다르지만, 우리의 생각은 어제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 이 위기감 제습버튼 속에 습기와 함께 사라지지 않기를. 새로운 세상을 준비해야만 하는 지금 북큐레이션이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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