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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오항녕의 조선, 문명으로 읽다

벼·보리는 기본, 모밀·수박·담배 등 40여 종 키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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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19세기 예천 농부 박득녕의 365일

오항녕 전주대 사학과(대학원) 교수

오항녕 전주대 사학과(대학원) 교수

어릴 적 내가 자란 시골 외갓집의 여름 밥상은 으레 다음과 같았다. 감자와 풋고추, 우렁이 들어간 된장찌개, 상추·호박이나 비름 혹은 가지 볶음, 노각이나 미나리 무침, 오이냉국이나 젓국 혹은 토란국, 마늘이나 무장아찌. 거기에 집에서 키우는 닭이 낳은 달걀, 냇가에서 잡아 온 각종 물고기 조림이 더해질 수 있었다. 어쩌다 닭이나 돼지고기도 올랐다. 대부분 텃밭이나 들판, 그러니까 집 주변에서 얻을 수 있는 식재료였다. 간식으로는 콩, 옥수수, 말린 붕어 구운 것, 미꾸라지나 개구리 구이, 참외나 복숭아, 그리고 가끔 수박이 있었다.

다품종 자급 경영이 일반적 형태
감·대추·밤 등 키우며 살림에 보태

북녘선 조·귀리 등 곡식만 10여종
전쟁 때도 누에 치며 땟거리 마련

일제강점기 때 쌀 위주로 바뀌어
곡물 다양성 사라진 오늘과 대비

나는 어려서 주로 쌀밥을 먹었고 보리밥을 먹은 기억이 거의 없다. 보리밥은 여름날 별식으로만 먹었다. 내 고향은 산골처럼 농경지가 귀한 곳이 아니라 성환에서 평택까지 30리 이상 이어지는 평야지대였기 때문이다. 수수·좁쌀도 먹었지만 주식인 적은 거의 없었고, 싸라기 섞어 닭 모이로 주었다. 외가 개울 건너편에 14대째 동족부락을 이루어 살고 있던 친가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식생활 풍경은 대체로 조선의 연장이었다. 경지 정리된 논에서 생산되는 쌀을 중심으로 삼는 농업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시대의 소산이다.

함경도 비축곡의 24%는 귀리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첩에 포함된 논갈이 그림. 소 한 쌍이 쟁기를 끌고, 농군 둘이 흙을 고르고 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첩에 포함된 논갈이 그림. 소 한 쌍이 쟁기를 끌고, 농군 둘이 흙을 고르고 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지리서 『여지도서』를 통해 1759년(영조 35)의 통계를 기준으로 함경도 23개 고을 중 21개 고을의 곡식 내역을 확인할 수 있다. (문용식 2022) 함경도의 환곡 항목에 쌀(大米)·매조미쌀(大米)·좁쌀(田米)·수수쌀(唐米)·벼(租)·조(粟)·피(稷)·보리(牟)·콩(太)·팥(小豆)·메밀(木麥)·귀리(耳麥) 등 12가지 곡식 종류가 보인다. 우리가 다 들어본 곡식이지만 요즘은 실제로 이렇게 다양한 곡식을 먹지 않는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이들 곡식의 비중이 어느 한 곡식에 편중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함경도 비축곡을 보면 귀리 24%, 보리 16%, 좁쌀·피·콩이 각각 13%, 수수쌀이 7%, 조가 6%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함경도는 쌀 재배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비축곡 중 채 1%도 되지 않았다.

삼남(三南, 충청·전라·경상) 지방은 어떠했을까. 이 지역은 북부와는 달리 논이 많았다. 조선시대 농가에서 뭘 심어 먹고 살았는지, 19세기 경북 예천 맛질에 살던 박득녕(朴得寧·1808~1886)의 농사에 대한 연구를 참고해 보자. (김건태 2011) 그는 다음과 같은 작물을 심었다.

①논: 벼·보리 ②밭: 보리밀(小麥)·조·콩(太, 豆)·기장·녹두·모밀 ③상품작물: 면화·담배·삼베(麻)·참깨·들깨·왕골 ④채소류: 가지·무·배추·토란·파·염교(薤)·미나리·상추·부추·호박·고추·마늘·겨자·개대(芥帶)·수개(蕭芥)·아주까리·수박·참외·박(花苽)·오이·동아(童牙)·백정자(栢亭子)·꼭두서니(茜).

박득녕의 일기인 『저상일월(渚上日月)』에서 확인되는 작물이 40여 종류인데, 내가 알지 못하는 채소 이름도 보인다. 곡물의 경우는 함경도보다 종류가 적다. 그렇더라도 비슷한 시기 경상도 김흥락(金興洛·1827∼1899)이 4두락 밭에 7가지 곡물을 심었던 점을 떠올리면 다품종 경영이 일반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앙법 보급되며 노동력 덜어

1920년 일제의 산미증식계획 이후 조선 농업이 쌀 단일 종목으로 재편되는 위험을 지적한 동아일보 1924년 10월 6일자 사설. “백미 하나에 의지하여 먹고 입고 쓰며 활동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는 우리의 생업이 십분 안전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썼다. [중앙포토]

1920년 일제의 산미증식계획 이후 조선 농업이 쌀 단일 종목으로 재편되는 위험을 지적한 동아일보 1924년 10월 6일자 사설. “백미 하나에 의지하여 먹고 입고 쓰며 활동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는 우리의 생업이 십분 안전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썼다. [중앙포토]

박득녕의 관심은 논농사, 즉 쌀에 집중돼 있었다. 당시에는 이앙법이 널리 보급돼 김매기 노동력을 절약할 수 있었다. 이를 밭으로 돌려 밭작물 재배에 투여함으로써 밭농사의 집약화가 가능했기에 면화·담배같이 일손이 많이 필요한 작물도 재배할 수 있었다. 박득녕이나 김흥락이 밭을 집약적으로 이용한 것이 아님은 『귀전록(歸田錄)』 같은 자료에서도 알 수 있는데, 간종(間種)이나 혼작(混作)은 매우 흔한 일이었다.

박득녕도 밭에 다양한 곡물을 재배했는데, 밭작물 가운데 특히 보리 재배에 관심을 쏟았다. 보리 파종은 봄·가을 두 차례에 나누어 했다. 이런 이유로 밭의 활용도가 140%에 이르게 되었다. 지력을 보존하기 위해서 재 등 거름을 주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논에서도 보리를 재배했는데, 보리를 재배할 논에 밭보리 파종 때와 마찬가지로 재를 넉넉히 뿌려주는 일을 잊지 않았다. 논보리 파종도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했지만 대부분 봄에 이루어졌다. 농사 일정으로 보아 가을에 벼를 베어낸 논에 다시 가을보리를 파종하는 일이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인도 나브다냐(Navdanya)가 지켜낸 인권이자 주권의 토대인 각종 씨앗들. 나브다냐는 생물 및 문화 다양성 보호를 위한 여성 농부 주도 운동이다. 곡물자급도 19.3%에 불과한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중앙포토]

인도 나브다냐(Navdanya)가 지켜낸 인권이자 주권의 토대인 각종 씨앗들. 나브다냐는 생물 및 문화 다양성 보호를 위한 여성 농부 주도 운동이다. 곡물자급도 19.3%에 불과한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중앙포토]

옷감을 확보하는 일도 중요했다. 박득녕은 김매기를 마친 뒤 익는 면화부터 차례로 땄다. 또한 삼베도 재배했다. 베를 심을 밭에 재를 뿌린 다음 씨앗을 뿌렸다. 밭에서 석 달 정도 기른 다음 7월 하순경에 거두어들였다. 베어낸 베는 곧바로 구덩이에 묻어 익혔다. 베는 익혀야만 껍질을 쉽게 벗길 수 있기 때문이다.

가을이 깊어가는 전남 고흥 들판. [연합뉴스]

가을이 깊어가는 전남 고흥 들판. [연합뉴스]

의류 작물 재배는 『쇄미록(瑣尾錄)』의 저자 오희문(吳希文·1539~1613)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왜란 피난살이 와중에 누에를 쳐서 생계에 보탰다. 4~5월에 뽕잎을 따다가 부인과 딸들이 양잠을 했다. 이때 하루에 소로 두 바리 이상의 뽕잎이 필요하였다. 뽕잎을 따는 일은 노비들이 맡았는데, 자연히 농사일과 겹쳐 일이 고된 상황이 되기도 했다. 오희문의 양잠은 명주를 장날에 내다 팔아 식량을 마련하려고 시작한 것이다.

박득녕은 담배도 재배했다. 담배는 모판에서 두 달 정도 기른 다음 밭에 옮겨 심었다. 담배는 주로 노는 밭에서 재배했지만 보리밭에 그루갈이로 재배하기도 했다. 김매기 두 차례, 곁가지 꺾어주기, 약 뿌리기, 거름주기 등 품이 들어갔다.

돗자리 만들며 친구들과 한잔

갖은 채소가 자라는 도시 옥상 텃밭. [중앙포토]

갖은 채소가 자라는 도시 옥상 텃밭. [중앙포토]

한편 그는 논 일부에 돗자리의 재료가 되는 왕골을 재배했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밭에 물을 대고 왕골을 심었다. 왕골이 한여름에 훌쩍 자라 밭에 빼곡했던 기억이 있으니, 대략 4~5월경에 심은 듯 보인다. 외할아버지는 다 자란 왕골을 베어 말리고 적당한 길이로 잘라 두었다가 한겨울 사랑방에서 돗자리를 짰다. 사랑방 깔개로도 쓰고, 무엇보다 제사 때 깔 돗자리를 정성껏 준비했다. 그리고도 남는 돗자리는 장날 친구분들과 한잔할 수 있는 용도로 쓰셨다.

산이나 구릉이 없어 과실이 적었던 내 고향의 농사와는 달리, 경상도의 박득녕은 감·대추·밤·배·호도·매실·복숭아·석류 등 다양한 과일을 재배했다. 특히 감 농사는 가사 경제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나머지 과일은 제수로 사용하거나 기호품으로 활용한 목적으로 소량 재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조선 사람들은 우리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내다 팔아서 얻는 이윤보다 먹고사는 데 필요한 자급(sufficiency)에 중심을 두었다. 또 식민지 강점기를 거치면서 곡물의 다양성을 상실하고 쌀 중심 농업이 된 지금과도 달랐다. 이렇듯 농사 역시 역사의 산물이다.

다품종 소량생산 대체한 플랜테이션 농업

인류 농업사를 살펴보면 사람들은 대부분의 기간에 결코 단일작물을 재배하지 않았다. 사탕수수·담배·커피·코코아·고무 등 단일작물을 재배한 것은 19세기 이후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시기의 일이다. 단일작물의 공통점은 시장에 팔기 위해 키우는 상품작물이란 점이다. 이 상품을 소비할 시장이 되는 지역에서는 재배할 수 없는 작물을 식민지로 침탈한 열대 또는 아열대 지역에서 저임금 또는 노예 노동으로 재배·판매했다.

그러므로 당초 현지 농업이나 경제 생태계와는 전혀 무관했다. 식민주의자들의 폭력적 단작(單作) 플랜테이션으로 인해 생활 터전을 잃은 현지인은 자급자족 기반을 잃고 임금노예로 전락했다. 돈을 벌어야 식품을 살 수 있게 됐다.

플랜테이션 작물은 현재 극소수 다국적 기업이 장악하고 있다. 예를 들어 바나나를 주무르는 돌(Dole)·델몬트·스미후루 등이다. 이로 인해 바나나 생산국들은 을의 신세로 떨어졌고, ‘바나나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쓰고 수시로 파국에 직면한다.

이에 대한 대안 사례가 있다. 인도 하이데라바드의 농촌 여성들은 보석 같은 빛깔과 알싸한 향의 씨앗 봉투를 가지고 있다. 토착 종자이다. 이 덕분에 이들은 농노의 운명에서 벗어나 자립적인 농부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그들이 어머니·할머니에게 물어서 전통 종자를 찾은 결과였다. 혼작(混作) 농법은 한 토지에 예닐곱 가지 다른 종자를 심는 방식으로, 일종의 ‘생태 보험’ 같은 구실을 한다. 강우량이 많든 적든, 비가 일찍 오든 늦게 오든, 뿌린 씨앗의 일부는 자랄 것이다. 날씨가 어떻든 먹을 만큼은 수확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값비싼 유전자 조작 종자나 화학농약과 비료를 살 필요도 없어진다. 그래서 안전하다.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 아래서 농민은 자신이 필요한 다양한 농산물을 스스로 생산한다. 그들은 자가소비를 하고 남는 농산물을 시장에 내다 팔기 때문에 잉여 농산물이 팔리지 않더라도 지나치게 노심초사하지 않고 맘 편히 지낼 수 있다.

오항녕 전주대 사학과(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