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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가 발레? 돈 버린다" 이런 말에도 러시아 거머쥔 韓발레리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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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마린스키 수석 무용수 김기민. 지난 16일 서울 서초구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초 캠퍼스에서 중앙일보와 만났다. 그가 기대고 있는 바(barre)는 그의 평생 동반자다. 김상선 기자

마린스키 수석 무용수 김기민. 지난 16일 서울 서초구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초 캠퍼스에서 중앙일보와 만났다. 그가 기대고 있는 바(barre)는 그의 평생 동반자다. 김상선 기자

“제가 못하는 거를 즐기고 안 되는 거에 욕심이 나요. 안 되는 걸 되게 하는, 극복의 과정을 즐기는 거죠. 저도 불구덩이에 뛰어들었다가 많이 울기도 하지만, 여러 경험을 통해 성장하려고 해요.”  

한국뿐 아니라 러시아를 대표하는 발레 무용수로 우뚝 선 김기민(30)의 말이다. ‘김기민’ 세 글자는 발레 역사에 깊이 각인됐다. 아시아인 최초로 러시아 대표 마린스키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로 발탁됐고, 강산이 바뀌는 동안 주역으로 관객의 기립박수를 받아왔다. 한국 남성 무용수로서는 최초로 ‘발레계의 아카데미 상’으로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도 수상했다. 마린스키의 발레리나들은 “‘기미냐(기민을 친근히 부르는 호칭)는 최고의 파트너’”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런 그는 정작 “성공을 했다고 해도 다음 목표가 또 있다”며 “나도 ‘현타(꿈에 빠져있다가 현실을 깨닫는 것)’가 자주 오지만, 넘어져도 즐기면서 앞으로 나아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를 만난 건 지난 16일, 그가 ‘발레 영재’로 졸업한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연습실. 오전 10시30분인데 그의 머리카락과 옷은 땀 범벅. 전날 장거리 비행 후 서울에 도착했지만 아침 7시에 일어나 코어근육 단련 등 루틴을 이미 끝냈다. 3년 9개월만에 고국 땅을 밟은 것은 공연을 위해서다. 18~20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발레 수프림 2022’ 갈라 무대에 오른다. 영국·프랑스·독일 발레단 등의 내로라하는 대표주자들을 모은 구심점이 김기민이다. 다음은 일문일답 요지.

한국 무대, 오랜만이네요.  
“너무 기뻐요. 형(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김기완)도 만날 수 있고요. 지금은 (파리오페라발레단 수석무용수 박)세은 누나, (미국 아메리칸발레시어터, ABT 수석무용수) 서희 누나 등, 수많은 한국 무용수들이 세계에서 날개를 펼치고 있는 때라 더욱 반갑고 자랑스러워요.”  

김기민 무용수의 다양한 포즈. 마린스키 발레단에서도 '배려의 아이콘'으로 통하는 그는 다양한 포즈를 먼저 제안하는 적극적인 모습으로 현장을 감동시켰다. 김상선 기자

점프를 한 상태에서 두 발을 서로 마주치는 카브리올 점프의 정석을 선보이는 김기민 무용수. 김상선 기자
김기민 무용수가 '해적' 알리 역할의 대표적 포즈를 보이고 있다. 그에게 알리 역할은 의미가 크다. 이번 서울 '발레 수프림 2022' 무대에서도 선보인다. 김상선 기자
김기민 씨는 표정도 풍부했다. 김상선 기자
발레 무용수로서 이미 완벽한 커리어를 쌓았는데 이제 막 서른이네요.  
“제가 욕심이 좀, 많아요. 같은 작품이라고 해도 매일 다른 표현을 관객께 보여드리고 싶어요. 오늘은 (‘라 바야데르’의 주역) 솔로르를 자신감이 흘러넘치게 표현했다면 내일은 우유부단하지만 어쩔 수 없이 사랑에 이끌리는 모습으로 보여드리는 거죠. 무대에 서서 춤을 추고 관객과 소통할 수 있다는 행운이 감사하고 행복해서 매번 마음이 벅차올라요.”
1년 후, 5년 후, 10년 후 김기민은 어떤 무용수일까요.  
“전성기를 마흔으로 잡고 싶어요. 오래 춤을 추고 싶어서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죠. 2년 전부터인가 무슨 일이 있어도 모닝 운동 루틴을 지키자고 맘먹고, 발레를 그만두는 날까지 계속하려고 해요. 물론 힘들지만 그러니까 더욱 아침에 그냥 빨리 끝내려고 해요(웃음). 20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테크닉과 경험을 쌓아온 노력의 과정을 지났기에 지금 무대의 제가 있으니까요. 저는 산전수전을 다 겪고 싶어요. 그게 저 자신에겐 좋은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관객에겐 (표현력이 풍부해지니)  좋은 일이죠.”  
한때 ‘발레하면 안 된다’는 얘기도 들었었다고요.  
“발레를 10살에 시작했는데 12살엔가 콩쿨 후에 ‘얘는 발레 시키면 돈 버리는 거다’라는 말을 들었어요. 하지만 그후 이원국 선생님을 만나서 ‘세계적 아이가 될 거다’라고 해주셨고, 한예종 김선희 교수님께서도 저를 감사히 이끌어주셨죠. 덕분에 제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블라디미르 김 선생님, 마가리타 쿨릭 선생님을 만났고요. 저는 약점이 많은 무용수였어요. 그게 오히려 강점이 됐다고 생각해요.”  
김기민 무용수가 약점이 많다는 건 망언 아닌가요.  
“(웃으며) 저 다리 라인 진짜 안 예뻤어요. 노력 많이 했어요. 약점이 많았던 덕분에, 안 되는 걸 되게 해본 경험이 있으니 더 성장할 수 있었다고 봐요. 못했던 걸 어떻게 하면 잘하게 할 수 있는지를 아니까요. 그런데요, 제일 중요한 건 자기를 사랑하는 거 같아요. 자기를 사랑하지 않으면 무용수는 무대에서 행복할 수 없거든요. 제 다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방법도 선생님들께 배웠고요. 자기를 사랑하는 것도 노력이 필요해요.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성장하면서 사랑하는 거요.”  
어린 시절의 김기민 무용수. 모스크바 발레콩쿠르 은상을 수상했을 당시 프로필 사진이다. [중앙포토]

어린 시절의 김기민 무용수. 모스크바 발레콩쿠르 은상을 수상했을 당시 프로필 사진이다. [중앙포토]

발레 기본 연습인 바(barre)워크는 거르지 않지요?  
“바워크 중독이에요(웃음). 기본이란 게 깨기는 쉬운데 지키긴 어렵잖아요. 선생님들께 혼난 적도 많아요. 연습 너무 많이 한다고요(웃음). 그런데 요즘 많이 생각하는 게 밸런스, 균형이에요. 욕심이라는 게, 버리기 시작하면 계속 버려지잖아요. 잘하려는 욕심은 계속 내면서도 아 이건 너무 과도하다, 더 하면 끊어질 것 같다, 이런 느낌을 찾으려고 해요. 재능이 많지만 밸런스를 찾지 못해서 젊은 나이에 은퇴하는 무용수들도 많으니까요. 결국은 멘탈 싸움, 마인드 컨트롤이 중요하고 그 핵심은 밸런스 잡는 것 같아요. 집요하게 연습을 하고, 힘들어도 매일을 그냥 쉽게 보내고 싶지 않아요. 다 약이 될 거라고 믿어요. 어떤 일이 오든 다 받아들여야죠.”  
발레 동작에서도 밸런스가 기본이죠.  
“네, 춤도 밸런스가 중요하죠. 기본기와 표현력 사이 균형이 대표적이죠. 기본만 집중하면 로봇처럼 움직이고, 표현에만 집중하면 춤이 흐트러지니까요. 발레는 할수록 어려워요(웃음).”  
마린스키 발레리나 빅토리아 테레쉬키나가 기민 씨를 “배려심 많은 최고의 파트너”라고 칭찬하는 영상이 화제였어요.  
“관객 입장에서 무용수를 볼 때 가장 좋은 순간은 결국 그 무용수들이 자연스러워 보일 때거든요. 파트너와 호흡, 즉, 서로에 대한 배려와 소통이 중요한 이유죠. 리허설은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서로의 작품 해석에 대해 배려를 갖고 소통하면서 시너지를 내는 거죠. 무대 위에선 최대한 여성 무용수만 바라보고 집중해요.” 
발레의 매력을 짧게 표현해주신다면. 
“발레는 몸으로 말하는 언어이고, 언어는 소통을 위한 거잖아요. 소통은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서고요. 그래서 저는 발레는 사랑, 그리고 평화 이런 단어들과 가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어렵지만 아름다운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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