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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조세린 클라크의 문화산책

물을 다스리는 지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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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조세린 클라크 배재대 동양학 교수

조세린 클라크 배재대 동양학 교수

‘가을이 되자 황하에 모든 강물이 흘러들어 물이 불어나니 물살이 몹시 심해  건너편의 소와 말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때 황하의 신 하백은 스스로 기뻐하며 천하의 아름다움이 모두 자기에게 속한다고 생각했다.’ (『장자』 외편 ‘추수(秋水)’ 중에서)

내 고향 알래스카 남동부에서는 두 달 넘게 비가 그치지 않고 내릴 때도 있다. 얼음과 숲으로 둘러싸인 주노(Juneau)시의 동쪽으로는 거대한 빙원, 서쪽으로는 해안이 있고 나무는 어디에나 빽빽하다. 하층구름과 설괴빙원에서 떨어진 물은 개울을 이루어, 숲에서 불어오는 끝없는 바람에 흔들리는 덤불의 젖줄이 된다.

중국 신화 속 요·순·곤·우
임금의 주요 역할은 치수
한국 단가·판소리에 등장
그들의 통찰력 본받아야

중국 고대신화에 등장하는 우 임금 동상. 홍수를 다스렸다고 한다. [사진 바이두]

중국 고대신화에 등장하는 우 임금 동상. 홍수를 다스렸다고 한다. [사진 바이두]

태평양 건너 이쪽, 살이 타는 듯한 뜨거운 비와 뇌 정지를 일으키는 습도의 조합은 또 다른 존재다. 지독히도 습하고 줄기차게 비가 내리던 이번 장마 끝에, 입추가 지나자마자 서울은 ‘물폭탄’을 맞았다. 서울 강남의 브랜드는 이번에 싸이의 말춤에서 제네시스 차량 위에 정장 차림으로 앉아 홍수 장면을 찍어 소셜미디어에 올린 ‘제네시스남’으로 바뀌었다.

너무 많든 적든, 물 문제는 현대의 머리기사를 장식할 뿐 아니라 동아시아 신화·역사에서 오래도록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한국 판소리와 단가에도 4000년 전 중국에서 치수(治水)에 힘을 쏟은 인물들을 언급한다. 중국 하나라 우 임금은 한꺼번에 불어나 대홍수를 일으킨 황하와 양쯔강의 물길을 통제하는 방법을 강구한 공으로 줄곧 칭송을 받아 왔다. 우의 아버지 곤(鯀)은 홍수 사업에 매달렸다.

신화에 따르면 곤은 스스로 자라나는 흙인 ‘식양’(息壤)을 신들에게서 훔쳐내 둑을 쌓았다고 한다. 그러나 식양이 너무 높이 자라다 못해 무너지는 바람에 많은 사람이 익사했다. 이를 본 우는 물이 흘러갈 길을 내는 것이 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 깊거나 넓은 수로를 파든지, 관개용 수로를 여러 군데 내는 것이다. 1760년 영조가 (현대의 강남이 포함되지 않은) 서울의 홍수 피해를 방지하고자 20만 백성을 동원했다는, 준천사실(濬川事實)에 기록된 개수 공사와 매우 유사하다. 우 임금의 통찰은 후토신(后土神)이 개입했다는 정도로만 기록되어 있는데, 여신이 보낸 새가 우에게 물이 언제나 바다로 흘러가게끔 수로를 파라고 귀띔했다고 한다.

중국 하나라 시조인 우는 한국 노래에 단독으로 언급되는 법이 거의 없고, 역시 홍수 문제 해결을 꾀했던 요·순 임금과 함께 거론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 임금이 역사에 등장하기 전부터 많은 준비 작업이 이뤄져 있었다. 요 임금은 우의 아버지 곤을 해임한 뒤 순을 임명해 홍수를 통제하게 한다. 명을 받은 순은 산에서 평야로 내려가 비바람과 번개에 맞서 싸운 뒤 홍수가 난 땅을 정리해 주(州) 또는 섬으로 탈바꿈하고 가장 높은 산에서 안전하게 관리하게 한다. 순은 중량·계량·관례 등을 규격화하고 달력을 개량한다. 이와 같은 규격화를 통해 각양각색의 정치가들이 다스리는 광대한 영토에서 동시에 홍수 통제가 가능해진 것이다.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큰 접근법이다.

내 고향 알래스카에 영향을 미친 기후 및 지질학적 사건을 연구하던 과학자들은 해당 지역의 원주민들에게 이야기, 노래, 예술 등의 형식으로 세대를 거쳐 전수되어 온 토착 지식에 점차 눈을 돌리고 있다. 과학자들의 학술 연구가 토착민의 구술 기록의 진실성을 확증할 뿐 아니라 때로는 그 기록을 따라가기까지 하는 것이다.

미국 고문서 및 고대 중국 학자인 세러 앨런은 중국의 옛이야기에서 요, 순, 곤, 우가 맞닥뜨렸던 대홍수는 실제 역사적 사건이 아닌 ‘지옥으로부터 흘러나온 물의 신화적 범람’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2016년 사이언스지에 실린 ‘기원전 1920년 홍수는 중국에서 발생한 대홍수와 하나라의 역사성을 지지한다’는 제목의 논문에서는 기원전 1920년 지진으로 발생한 산사태로 황하의 둑이 무너져 범람했다는 증거를 인용한다. 대홍수와 관련된 중국 이야기들은 이 사건을 바탕으로 했을 것이다.

현대의 ‘물폭탄’은 지구온난화로 인한 전례 없는 일이지만, 봄·가을 홍수에 대비하는 문제는 최소한 5000년의 역사를 지닌 문제다. 반지하 주거 시설을 없애겠다는 식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지도자는 한국 노래 가사에 언급될 일이 없을 것이다. 21세기 한국 가요의 고전 가사에 이름을 올릴 지도자라면 단연 우 임금 같은 혁신적인 인물이어야 하지 않을까.

조세린 클라크 배재대 동양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