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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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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김현예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김현예 도쿄 특파원

김현예 도쿄 특파원

길옆으로 풀이 한가득 나 있는 논두렁길. 한 아낙네가 머리에 한가득 나물을 이고 길을 간다. 너댓살은 됐을까. 흰 고무신 신은 까까머리 아이가 엄마를 몇 발자국 앞서 걸어간다. 말 하나 안 통하는 일본 청년이 들이댄 카메라에 아낙네가 함박웃음을 짓는다. 어린 아들은 손에 든 나뭇가지를 머리 위로 한껏 쳐들었다. 사진작가 후지모토 다쿠미(藤本巧·73)가 찍은 ‘김해평야’(1978년)다.

후지모토가 한국에 첫발을 내디딘 건 1970년. 나이 스무 살 때였다. 처음엔 빵과 우유만 먹었다. 어찌해도 낯선 한국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다. 그러다 들른 곳에서 된장국을 맛보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직지사와 통도사, 부산의 자갈치 시장과 김해평야, 강화도까지 돌면서 한국인의 일상으로 눈을 돌렸다. 그렇게 한국의 방방곡곡을 카메라에 담은 지 약 50년. 한국인의 삶을 고스란히 담은 그의 사진 4만6377점은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됐다.

한국인의 일상을 50년 넘게 찍어온 후지모토 다쿠미가 ‘김해평야’(1978년)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사진 주일 한국문화원]

한국인의 일상을 50년 넘게 찍어온 후지모토 다쿠미가 ‘김해평야’(1978년)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사진 주일 한국문화원]

일본 도쿄 한국문화원에서 한 달 여정으로 지난달 29일부터 시작한 ‘보고 느끼는 한국 식문화전’에서 그를 만났다. “1970년대만 해도 한국이 일본보다 30년, 50년 늦었다고 했었어요. 그런데 저는 문화로 접근했으니까, 한국이 가난해 보이는 게 아니라 아름답게 보였어요. 한국이 저를 키워준 느낌마저 듭니다.”

그의 이름 ‘다쿠미’는 한 사람의 이름에서 따왔다. 그의 부친은 일본 시마네현의 한 미술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쳤다. 그때 부친이 가르친 것이 민예(民藝). 일본 미술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가 일본에 전파한 조선의 민족예술이다. 조선 민화와 그릇의 아름다움을 알린 야나기를 공부하던 부친은, 처음 야나기에게 조선의 아름다움을 소개한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1891~1931)에 빠졌다. 『조선의 소반』(1929)을 쓸 정도로 조선을 사랑한 아사카와 다쿠미는 41세에 요절했는데, 서울 망우리에 묻혔다. 후지모토는 “부친이 미술을 가르칠 때가 20대였는데, 나중에 아들을 낳으면 아사카와 다쿠미처럼 살기를 바랐다. 좋은 이름을 지어주셨다”며 활짝 웃었다.

우리에겐 해방을, 일본엔 패전을 안겨다 준 광복절이 지났다. 일본 전역에 생중계된 ‘종전식’을 지켜봤다. 올해도 어김없이 일본 총리 입에서는 전쟁에 대한 반성 한마디 흘러나오지 않았다. 머리에 맴돌았던 후지모토의 말을 전해본다. “행복은 남의 것을 뺏는 데서 얻어지지 않습니다. 행복의 길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공존하는 데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