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은 가뭄 때 TSMC 먼저, 한국은 민원에 발목…이러고 K반도체 지킬 수 있나“

중앙일보

입력 2022.08.16 18:52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이 심해지는 가운데 우리나라 반도체 기업들의 투자환경이 악화하고 있다. 일러스트=김지윤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이 심해지는 가운데 우리나라 반도체 기업들의 투자환경이 악화하고 있다. 일러스트=김지윤

보조금 520억 달러(약 68조원) 지원. 시설투자 금액의 25% 세액 공제-. 지난 9일(현지시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서명한 ‘반도체와 과학법에 포함된 반도체 지원법’의 주요 내용이다. 지원 대상은 미국에 반도체 제조·연구 시설을 짓는 기업이다.

이에 따라 인텔·마이크론 등 미국 기업뿐 아니라 미국 현지에 공장 증설 혹은 투자를 약속한 삼성전자·SK하이닉스, 대만 TSMC 등도 수혜를 볼 전망이다.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170억 달러(약 22조3000억원) 규모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앞으로 20년 동안 1921억 달러(약 251조8000억원)를 투자해 테일러시에 9개, 같은 주 오스틴시에 2개의 반도체 공장을 신설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미국 ‘반도체 지원법’ 시행에 수혜 전망 

SK그룹은 최태원 회장이 지난달 바이든 대통령과 화상 면담에서 밝힌 220억 달러(약 28조8000억원) 규모의 대미 신규 투자 중 150억 달러(약 19조7000억원)를 반도체 첨단 패키징 제조 시설과 연구개발(R&D) 협력에 투입할 계획이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미국 현지에 진출해 첨단기술과 장비·부품 등의 공급망을 안정화하고, 고객 관리를 용이하게 하면서 지원금과 세제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 법안에 따라 미국의 지원을 받으려면 ‘10년 동안 중국 등 우려국 투자 제한’이라는 단서 조항을 지켜야 한다는 데서 셈법이 복잡해진다.

황철성 서울대 재료공학부 석좌교수는 이 같은 상황에 대해 “결정하기 몹시 어려운 처지”라고 진단했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에서 전체 낸드플래시의 40%가량을 생산한다. 미국의 지원을 받으면서 시안 투자를 접는 것, 시안에 계속 투자하면서 미국 정부와 불편한 관계에 놓이는 것 모두 삼성전자에 어려운 선택지다. SK하이닉스 역시 중국 우시와 다롄에서 각각 D램·낸드플래시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 6월 SK하이닉스는 우시 공장 확장과 장비 투자에 2조4000억원을 투자했다.

‘중국 투자 제한’에 경쟁력 강화 위협 

황 교수는 “현재 구도를 보면 한국 기업이 양쯔메모리테크놀러지(YMTC) 같은 중국 메모리 반도체 기업과 경쟁하게 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미국 반도체 기업과 경쟁하는 상황이 될 가능성이 크다”도 분석했다. 반도체 지원법에서 자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을 추진하겠다는 목적이 엿보이는 만큼 결국 경쟁자는 미국 기업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자국 기업 중심으로 지원책을 펴야 하며 아시아 국가에 대한 생산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인텔은 TSMC가 선두를 달리는 파운드리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경쟁한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외교적으로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데다 개별 기업들은 결국 중국·미국의 반도체 기업과 모두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서 기업의 설비 투자와 초격차 기술력 확보가 한층 중요해졌다. 하지만 최근엔 글로벌 복합위기, 시장 불확실성 등으로 투자 속도를 조절하는 모습이다.

삼성전자 측은 지난 2분기 컨퍼런스콜에서 “중장기 수요 대응을 위한 적정한 수준의 인프라나 첨단 기술 투자는 계속하고, 업황과 연계해 설비 투자 운영을 유연하게 하겠다는 원칙은 그대로”라며 “다양한 이슈가 시장의 불확실성으로 이어지고 있어 재고 활용을 통해 유연하게 공급하면서 단기 설비 투자를 탄력적으로 재검토하며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SK하이닉스는 청주공장 증설 계획을 보류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글로벌 경영환경 변화와 패권 다툼 심화 속에서 경쟁 우위를 점하려면 정부의 지원 확대가 시급하다는 견해를 내놨다. 한국 역시 2026년까지 340조원 이상의 기업 투자 유치를 위한 인프라 지원, 규제 개선 등의 반도체 초강대국 달성 전략을 마련했다. 가령 평택·용인 반도체 단지 인프라 구축에 국비를 지원하고, 대기업 설비 투자 세액 공제율을 8~12%로 상향하는 등의 조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9일(현지시간) 백악관 잔디밭에서 중국을 견제하고 첨단 제조업 일자리를 미국으로 다시 가져오기 위한 지원책을 담은 반도체·과학법에 서명하자 의원들과 기업인들이 환호하고 있다. 사진 UPI=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9일(현지시간) 백악관 잔디밭에서 중국을 견제하고 첨단 제조업 일자리를 미국으로 다시 가져오기 위한 지원책을 담은 반도체·과학법에 서명하자 의원들과 기업인들이 환호하고 있다. 사진 UPI=연합뉴스

“정부 지원, 경쟁국에 못 미쳐”

하지만 대규모 지원 정책도 선진국 수준에 못 미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규석 한국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지난해 대만이 극심한 가뭄을 기록했을 때 대만 정부가 반도체 공장 인근 농민들을 직접 설득해 농업용수를 TSMC에 우선 공급할 수 있었다”며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건설이 주민 민원을 이유로 여주시의 공업용수 지원 반대에 부딪혀 있는 것과 대조되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SK하이닉스는 여주시에서 하루 26만5000t의 공업용수를 끌어오는 방안을 추진 중이지만, 여주시가 “한 지역만 희생할 수 없다”며 제동을 건 상황이다. 이에 산업통상자원부와 경기도 등이 ‘용인 반도체 산단 용수시설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대책을 협의 중이다.

경희권 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우리나라도 반도체 전략을 강화하고 있지만, 막대한 규모의 직접 보조금과 파격적 세제 혜택을 제공하는 주요국에 발맞춰 지원 정책을 확대하고 질적 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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