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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묻은 사람 봤다" 제보자는 수배범…'시약산 살인' 미제로 [사건 추적]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14일 오전 부산 서구 서대신동에 있는 한 아파트. 시약산자락에 위치한 이 아파트 단지 옆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5분가량 오르자 등산로가 나타났다. 평소 등산객이 많은 곳이지만 주말인 이날은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 등산로 입구에서 15분가량 더 올라 어른 키만 한 돌탑을 지나자 약수터가 나타났다. 등산로와 약수터를 이어주는 나무다리엔 ‘살인 사건의 목격자를 찾는다’는 빛바랜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부산 시약산 살인사건이 발생한 현장에 지난 14일 목격자를 찾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김민주 기자

부산 시약산 살인사건이 발생한 현장에 지난 14일 목격자를 찾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김민주 기자

집 나가 30분 만에 주검으로…시약산 살인사건
이 약수터는 지난해 4월 3일 이른바 ‘시약산 살인사건’이 발생한 곳이다. 피해자인 70대 남성 A씨는 이날 오전 5시30분쯤 산에 오르려고 집을 나섰다가 30분 만에 시신으로 발견됐다.

경찰은 A씨 얼굴에 상처가 집중됐다는 점에 주목했다. 재개발 시행 관련 일을 하던 A씨의 채무 관계가 복잡하고, 주변인과 관계도 원만하지 못하다는 점을 근거로 ‘면식범에 의한 우발적 살인’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70여명의 수사인력을 투입했다.

CCTV 없이 혐의자만 수백명, 흉기도 안 나왔다

경찰은 A씨에게 ‘적’이 많았던 것으로 파악했다. 경찰 관계자는 “A씨는 ‘지금 하는 일이 잘 풀리면 큰돈을 벌게 된다’는 말로 주변인에게 여러 차례 돈을 빌렸다. 공증을 쓰지 않은 경우도 많아 정확한 부채 액수를 짐작하기는 어렵지만 상당한 규모로 파악했다”고 했다. 업무 특성상 A씨는 평소 통화하는 사람도 많아 6개월 치 통화 목록에 오른 확인 대상자만 수백명에 달했다. 현장에 폐쇄회로(CC)TV가 없는 탓에 인근 500여세대 주민과 텃밭 경작자를 포함해 사건이 일어난 후 이사를 간 110세대 등도 용의 선상에 올랐다.

부산 시약산 살인사건이 발생한 등산로 초입에 지난 14일 폐쇄회로(CC)TV가 작동하고 있다. CCTV는 사건 발생 이후 설치됐다. 김민주 기자

부산 시약산 살인사건이 발생한 등산로 초입에 지난 14일 폐쇄회로(CC)TV가 작동하고 있다. CCTV는 사건 발생 이후 설치됐다. 김민주 기자

하지만 인상착의는커녕 범인 성별도 확정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 같은 대규모 탐문으로는 뾰족한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흉기도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은 A씨 상흔을 토대로 범행에 길이 7㎝가량 날붙이 흉기가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현장 인근을 뒤져 과도 등 칼 21자루를 발견했지만, 모두 사건과는 무관한 것으로 확인됐다.

DNA ‘불충분’ 유일한 제보는 ‘거짓’

사건 발생 3주 만에 A씨 등산스틱에서 DNA가 검출됐다. 확인된 것은 남성 1명과 여성 1명의 조각 DNA였다. 수법이 유사한 경남 무학산 50대 여성 살인사건(2015년 10월)도 이 조각 DNA를 감정해 6개월여 만에 해결된 적이 있어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이 ‘조각 DNA’가 누구의 것인지 특정하기에는 검출량이 충분치 않았다. 국립과학수사원 측과 이 문제를 논의한 경찰 관계자는 “스틱 끝부분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DNA가 묻을 수 있다. 만약 누구 것인지 특정하더라도, DNA의 주인이 곧 범인이라고 연결짓기엔 무리가 있었다”고 했다.

지난 14일 부산 시약산 살인사건 현장. 김민주 기자

지난 14일 부산 시약산 살인사건 현장. 김민주 기자

지난해 8월에는 이 사건과 관련한 처음이자 마지막 제보가 접수됐다. 제보자는 “집안 어른께서 사건 당일 등산하다가 피를 묻힌 채 산에서 내려가는 사람을 봤다고 하신다”고 했다. 그런데 제보자가 경찰 접촉을 피하면서 제보 내용을 확인하는 데 3개월이나 걸렸다. 어렵사리 경기도에서 제보자를 만났지만, 내용은 거짓이었다. 게다가 제보자는 사기죄로 수배 중인 사람이었다. 경찰 관계자는 “뉴스 내용을 보고 꾸며낸 제보였다. 수배 중인 사실을 파악해 검거, 관할 경찰서에 신병을 넘겼다”고 말했다.

1년 4개월 만에 미제전담팀으로

시약산 살인사건은 조만간 부산 서부경찰서에서 부산경찰청 미제전담팀으로 이첩된다. 미제전담팀 사건 이첩은 통상 발생 1~2년 사이에 이뤄지는데, 이는 사건과 관련해 더는 확인해볼 만한 실마리가 남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경찰 관계자는 “미제전담팀은 사건 초기부터 서부서와 함께 수사를 해왔다. 아직 단서가 나오지 않았지만, 범인은 피해자 주변에 있었을 가능성이 커 계속 수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4일 부산 시약산 살인사건이 발생한 등산로에 있는 돌탑의 모습. 이곳을 지나면 곧장 사건 현장인 약수터로 이어진다. 김민주 기자

지난 14일 부산 시약산 살인사건이 발생한 등산로에 있는 돌탑의 모습. 이곳을 지나면 곧장 사건 현장인 약수터로 이어진다. 김민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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