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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은 총수, 김범석은 아니다? 또 미뤄진 '외국인 총수' 지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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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공정거래위원회가 대기업집단 동일인(총수) 관련 개편 방향을 담은 공정거래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했지만, 이른바 ‘검은머리 외국인’을 대기업집단 총수로 지정하려던 방안은 이번에도 빠졌다. 당초 공정위는 외국 국적을 보유한 한국계 인사도 총수로 지정할 수 있도록 개정안을 준비해왔으나, 미국과의 통상마찰 우려로 산업통상자원부ㆍ외교부 등 관련부처에서 이견을 보이면서다.

16일 공정위ㆍ산업부 등에 따르면 대기업집단의 총수로 지정되면 배우자와 친인척의 보유 주식 현황은 물론이고 이들이 계열회사와 맺은 거래 내역까지 공시해야 한다. 그간 외국인 대주주에 대해선 총수 지정을 않다 보니 내국인만 규제하는 ‘역차별’이라는비판이 컸다.

국내 기업 '역차별' 논란

공정위가 지정한 대기업집단 76곳 가운데 외국인이 지배하는 곳은 쿠팡ㆍ에쓰오일ㆍ한국GM 등 3곳이다. 이들 3개 기업의 개인 대주주를 총수로 지정하면 에쓰오일의 경우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의 빈살만 왕세자를 총수로 지정해야 하는 정치ㆍ외교적 문제가 생긴다. 이런 문제를 피하기 위해 공정위는 한국계 외국인과 외국 국적을 가진 재벌 2~3세를 총수로 지정하는 안을 마련했다.

지난해 3월 12일 미국 뉴욕증권거래소 건물에 게양된 쿠팡의 로고와 태극기. 연합뉴스

지난해 3월 12일 미국 뉴욕증권거래소 건물에 게양된 쿠팡의 로고와 태극기. 연합뉴스

공정위 계획대로 시행령을 개정하면 총수로 지정할 수 있는 외국인은 김범석 쿠팡 이사회 의장뿐이다. 쿠팡은 지난해 5월 처음으로 대기업집단이 됐는데 김 의장이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쿠팡 법인’이 2년째 동일인으로 지정됐다. 하지만 관련 시행령 개정 여부가 불투명해지면서 내년에도 김 의장은 총수 지정에서 제외될 예정이다. 윤수현 공정위 부위원장은 “시행령 개정에 소요되는 기간 등을 고려하면 내년 지정이 쉽지 않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법 동의 못 하지만, 형평성은 맞춰야”

이에 따라 같은 국내시장을 두고 경쟁을 벌이는 ‘토종’ 기업만 규제하는 ‘역차별’ 논란은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쿠팡이 미국 나스닥 거래소에 상장하긴 했지만, 사실상 국내 영업비중이 대부분인데다 한국계인 김 의장이 창업주로 경영을 이끌고 있어서다. 국내 한국인 총수들은 관련 법상 허위 자료를 제출하거나 누락하면 2년 이하 징역이나 1억5000만원 이하 벌금형을 받을 수도 있는데, 김 의장은 이런 규제를 고스란히 피할 수 있는 셈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5대 그룹 부사장은 “대기업집단과 총수 지정 제도는 한국에만 있는 것이라 제도 자체에 문제점이 많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래도 제도를 시행한다면 형평성에 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김 의장만 빠지는 건 억울한 일”이라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나 김 의장이나 경영을 총괄한다는 면에선 사실상 다를 게 없지 않냐”고 말했다.

또 다른 공정거래법 전문가는 “대기업집단 제도가 없는 미국 입장에선 총수를 지정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라며 “쿠팡과 마찬가지로 다른 외국계 기업도 동일인을 법인으로 지정해 형평성을 맞추는 것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쿠팡, 한국서 사업 시작해 확장 

공정위는 쿠팡이 총수가 없는 다른 기업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본다.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기업 아람코가 최대주주인 에쓰오일이나 미국에 본사를 둔 GM(제너럴 모터스)과 달리 김 의장은 한국계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시작해 사업을 확장했다는 차이점도 있다. 쿠팡의 성장 과정을 고려해볼 때 총수가 이미 지정된 삼성 등의 한국기업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게 공정위 판단이다.

당초 계획한 개정안에 따르면 외국인 총수 지정 때는 일정 조건을 충족한 기업집단만을 대상으로 한다. ‘①사실상 국내에 거점을 둔 집단’, ‘②한국에서의 사업 비중이 전체의 일정 수준 이상’ 등을 요건으로 계획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해당하는 기업집단에 대해서만 외국인이라도 총수로 지정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특정 외국인이나 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닌 만큼 통상 우려도 크지 않다고 본다.

윤수현 공정거래위원회 부위원장이 10일 오전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동일인의 친족 범위 조정 등 대기업집단 제도 합리화를 위한 공정거래법 시행령 개정안 입법예고와 관련해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수현 공정거래위원회 부위원장이 10일 오전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동일인의 친족 범위 조정 등 대기업집단 제도 합리화를 위한 공정거래법 시행령 개정안 입법예고와 관련해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외국인 총수 지정이 무산되거나 무기한 연기될 경우 다른 기업에서도 유사한 공백 상황이 발생할 우려도 있다. 롯데그룹 신동빈 회장의 장남은 일본 국적으로, 최근 롯데케미칼의 임원을 맡았다. 현재는 신 회장이 롯데그룹 총수로 지정돼있지만, 추후 경영 승계가 이뤄질 경우 ‘사각지대’로 작용할 수 있다.

산업부, 통상 우려 추가 검토

산업부는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상 미국인이나 미국법인을 다른 나라보다 불리하게 대우하면 안 되는 만큼 외국인 총수 지정으로 인한 김 의장과 쿠팡 차별 대우 우려가 발생할 수 있어서다. 쿠팡이 미국 주식시장에 상장한 데다 소프트뱅크 등 외국자본 투자로 이뤄졌다는 점도 검토 중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통상 문제가 생길 수 있는 부분 등을 다각도로 검토해본 뒤 공정위와의 논의를 이어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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