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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졌던 서해 섬마을 ‘고기국수’ 20년만에 돌아왔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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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면

농사에 바닷일까지 하루 24시간이 모자란 섬마을 주민들은 닷새마다 돌아오는 장날을 다 챙기지는 못했다. 막내는 한 달에 한 번 아버지 손을 잡고 장배에 오르는 특권을 누렸다. 장배는 섬을 돌며 주민을 태운 뒤 육지까지 데려다주는 상선이었다. 당시 섬에선 장배가 육지로 나가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대처로 유학을 떠난 삼촌과 형, 누나도 장배를 타고 오갔다. 돌아오는 장배에는 소와 돼지가 실렸다. 돼지는 섬에서 애지중지 키우는 가축이었다. 번식력도 좋고 잔반을 처리해주는 데다 특별한 날엔 고기를 제공해주는 존재였다. 그래서 섬에선 고기가 늘 부족했다. 육지에서 손님이 오거나 잔칫날에나 먹을 수 있었다. 40~50년 전 충남 보령 섬에서 자란 아이들의 얘기다.

원산도를 비롯한 보령 지역 섬에서는 특별한 날이면 상에 ‘고기국수’가 올라왔다. 삶은 돼지고기를 얇게 편을 썰어 고명으로 얹어 먹는 국수다. 섬에선 논은 고사하고 밭도 넓지 않아 소를 키우는 집이 흔치 않았다. 고기가 워낙 귀해 소고기를 고명으로 얹을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나마 돼지고기도 양이 적어 얇게 썰었다.

주민들에 따르면 40년 전만 해도 섬에서는 삼겹살이나 목살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기름기가 많은 데다 가끔 먹다 보니 배탈이 날 때가 잦아서였다. 당시 어른들은 “모든 돼지고기는 삶아서 수육으로 먹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자연스레 돼지고기를 얇게 썰어 고기국수에 얹어 먹었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충남 보령시 원산도의 한 식당에서 20여 년 만에 새로 선보인 고기국수 상차림 모습. 신진호 기자

충남 보령시 원산도의 한 식당에서 20여 년 만에 새로 선보인 고기국수 상차림 모습. 신진호 기자

고기국수는 칠순·회갑이나 결혼식 피로연 때도 상에 올랐다. 원산도 맞은편 태안 안면도에서도 같은 풍습이 있었다. 육지와 단절된 섬 만의 독특한 음식문화였다. 그런 고기국수는 20년 전쯤 자취를 감췄다. 고기는 넉넉해졌지만, 집 대신 결혼식장이나 대형식당·뷔페에서 피로연을 열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그런 섬마을 고기국수가 최근 다시 등장했다. 원산도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추문식(67)씨가 젊은 시절 추억을 떠올리며 새로운 메뉴로 선보이면서다. 추씨는 원산도 토박이로 40년 전 장가갈 때 먹었던 고기국수가 생각나 아내와 상의 끝에 메뉴판에 추가했다.

추문식씨는 “(내가) 장가갈 때 마을에서 사흘간 잔치를 했다. 육지에서 하객이 오고 바다로 조업을 나갔던 주민들이 모두 잔치 음식을 먹으려면 그 정도 시간이 필요했다”며 “어릴 적, 청년 시절을 회상하며 고기국수를 메뉴에 올리게 됐다”고 말했다.

국수에 올리는 고기 고명은 돼지고기 앞다리나 뒷다릿살을 사용한다. 고기를 삶아낸 뒤 차갑게 식혀 회를 치듯이 얇게 썬다. 멸치로 국물을 내는 육지와 달리 바지락을 쓴다. 비린 맛이 없고 깔끔한 육수의 비결이다. 고기국수 반찬으로는 해풍(海風)을 맞고 자란 파김치를 곁들어 비로소 ‘삼합’을 이룬다. 주민들은 “잘 익은 파김치가 느끼할 수도 있는 고기의 맛을 감싸줘 담백한 맛이 난다”고 말했다.

지난 3월에는 보령 출신 개그맨 남희석씨가 다녀갔다는 입소문이 돌면서 고기국수를 찾는 관광객이 점차 늘고 있다. 원산도는 지난해 12월 1일 국내 최장(6.927㎞)인 보령해저터널이 개통하면서 접근성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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