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서경호 논설위원이 간다

바이든 공약 19개월 만에 통과…한국은 취임 직후 최대 추경

중앙일보

입력 2022.08.16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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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미국 인플레 감축법과 반도체법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정치적 대승리”(파이낸셜타임스)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The Inflation Reduction Act of 2022, IRA)이 7일(현지시간) 상원을 통과하자 호평이 쏟아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재확진을 받고 백악관에서 격리 중이던 바이든 대통령에겐 모처럼의 낭보였다.

민주당 내부 설득은 쉽지 않았다. 상원에서 ‘여당 내 야당’인 중도파 조 맨친 의원과 지난달 27일 극적 합의를 이끌어냈고, 커스틴 시네마 의원의 조건부 찬성을 얻어낸 게 결정적이었다. 물론 법안은 그 과정에서 수정됐다. 본회의 표결에서 찬성 50표 대 반대 50표를 기록했는데, 당연직 상원의장인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캐스팅보트로 찬성표를 행사해 가까스로 통과됐다.

기후변화에 대비하는 산업정책
당초 계획보단 4분의 1로 줄어

반도체와 과학법도 초당적 처리
중국 견제 첨단산업 공급망 강화

재정적자 감축 노력도 좋은 평가
한국도 허리띠 확실하게 조여야

인플레감축법 미 하원도 통과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가운데)이 12일(현지시간) 워싱턴 DC 국회의사당에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서명한 뒤 법안을 들고 의원들과 포즈를 취했다. 이날 하원은 IRA 법안을 220대 207로 가결했다. [AP=연합뉴스]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가운데)이 12일(현지시간) 워싱턴 DC 국회의사당에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서명한 뒤 법안을 들고 의원들과 포즈를 취했다. 이날 하원은 IRA 법안을 220대 207로 가결했다. [AP=연합뉴스]

IRA는 예상대로 민주당 다수의 하원에서 12일 무난히 가결됐고 바이든 대통령의 서명만 남겨뒀다. 기후변화 대응, 의료보장 확충, 대기업 증세를 골자로 하는 IRA 법안은 730쪽에 달하는 방대한 내용이다. 법인세 인상 등으로 7400억 달러(966조원)의 재원을 조달해 기후변화 대응과 건강보험 등 헬스케어를 위해 4300억 달러(562조원)를 지출하겠다는 마스터플랜을 담았다. IRA 지출의 86%에 달하는 3690억 달러(482조원)가 에너지와 기후변화 대응에 투입된다. 척 슈머 상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21세기의 결정적 입법이며, 미국에서 수용 가능한 청정에너지 시대를 여는 게임체인저이자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자평했다. 미국에서 청정에너지 생산이 가속화할 전망이어서 전기차와 배터리, 태양광·수소 등 청정·재생에너지 기업이 IRA 법안의 주요 수혜자로 꼽힌다.

IRA는 기후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한편, 중국을 배제하는 공급망 재편 전략이 담겨있다. 전기차·배터리 분야에서 ‘바이 아메리칸(Buy American·미국산 우선 구매)’ 정책이 촘촘하게 들어있다. 친환경 사업을 지원하며 미국산 원자재 비중이 높은 기업에 보조금을 확대하는 게 핵심이다. 신형 전기차 구매시 최대 7500달러의 세제 혜택을 받기 위해선 ‘바이 아메리칸’을 해야 한다. 미국이나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국가에서 채굴·제련한 원자재 비중이 일정수준 이상인 배터리를 써야 하는데, 이 비중은 2024년부터 단계적으로 올라간다. 해외의 ‘우려 국가’에서 추출·제조·재활용된 광물이 들어간 배터리를 사용하면 혜택을 받지 못하는데, 사실상 중국을 공급망에서 배제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민주당과 공화당이 상하원에서 1년여간의 조정과정을 거친 끝에 지난달 통과된 ‘반도체와 과학법(The CHIPS and Science Act of 2022)’도 미·중 기술패권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미국의 전략이다. 중장기 인공지능과 연관 첨단산업 역량을 높이기 위해 2800억 달러(365조원)의 연구개발 예산과 반도체산업 보조금을 투입한다.

산업연구원은 4일  ‘미국 반도체와 과학법의 정책적 시사점’ 보고서에서 “미·중 기술패권 경쟁과 경제·산업 분야 신(新)냉전의 본격적 신호탄”이라고 평가했다. 반도체와 과학법 역시 중국 견제용이다. 500억 달러 규모의 반도체 펀드를 지원받기 위해선 10년간 중국 등 요주의 국가 안에서 반도체 제조 역량을 확대하거나 신설 투자를 해선 안 된다. 내수용 저기술 반도체 시설은 예외로 하지만, 그 기준은 상무장관·국방장관·국가정보국장이 추후 결정한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반도체 시설·장비투자 대상의 25%를 세액공제해준다. 제조기업은 향후 10년간 240억 달러(31조원)의 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한다. 역시 혜택받는 기업은 중국 내 투자가 제한된다.

중국 포위 ‘디지털 만리장성’ 구축

경희권 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대만을 둘러싼 양안 갈등 등 대외위기와 경제 침체, 대법원의 판결을 둘러싼 낙태 논쟁, 총기규제 등 대내적으로 다층적 분열에 직면했음에도 미국 지도부는 반도체와 과학법을 초당적으로 처리했다”며 “반도체산업의 글로벌 분업 체계가 2025년쯤 다시 구조적 전환기에 돌입할 것”으로 분석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지난해 말 발간한 ‘미·중 반도체 패권 경쟁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 보고서에서 “미국은 반도체 핵심기술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면서 중국 반도체 산업이 신기술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중국을 포위하는 ‘디지털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아 철저하게 중국의 접근을 차단할 것”이라며 “단기적으로는 미국 주도의 공급망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고 우리의 자체 공급망 안정화에도 힘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한국은 2020년 기준으로 중국과 홍콩으로 메모리 반도체의 71.3%, 시스템 반도체의 46.6%를 수출했다. 한국 반도체 기업은 중국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과 중국 기업의 탄탄한 수요를 배경으로 몸집을 키웠으니 대중국 수출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반도체 소재와 장비 수입에선 대일 의존도가 높다. 특정 국가에 편중된 공급망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다.

IRA 법안 통과로 바이든 대통령이 오랜만에 정치적 승리를 거뒀다는 평가가 이어졌지만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바이든의 대선 공약을 담은 IRA는 취임 1년 7개월 만에 의회를 통과했지만 ‘더 나은 재건(Build Back Better Act, BBB)’이라는 이름으로 2조 달러를 투입하려던 당초 계획보다 4분의 1 수준으로 대폭 축소됐다. BBB는 지난해 3월 1조9000억 달러의 코로나 구호법과 지난해 11월 5500억 달러의 물적 인프라법에 이어 바이든의 세 번째 야심작이었지만 물가 불안과 증세를 우려하는 중도파 의원들의 반대로 지난해 말 무산됐다.

‘미니 BBB’라고 할 수 있는 IRA는 힘겹게 법률이 됐지만 이 과정에서 보육이나 무상 교육 등 인적 인프라 관련 내용이 사라졌다. 바이든의 핵심공약이 쪼그라든 것이다.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의 상하원 다수당 지위 유지가 어려울 것이며 2024년 대선까지 ‘바이드노믹스’ 기치를 내세운 추가적인 법안 통과는 기대하기 힘들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국제금융센터는 11일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안 주요 내용 및 평가’ 보고서에서 “IRA가 민주당의 승리로 홍보되고 있으나 지지자들은 기존 공약보다 축소된 사실에 주목할 것이고 공화당은 ‘민주당의 증세’를 공격하며 결집할 소지가 있다”는 옥스퍼드 애널리티카의 분석을 소개했다.

‘대선 1호 공약’ 추경 단행한 한국

바이드노믹스 색깔을 제대로 내기조차 쉽지 않은 미국에 비해 한국 대통령은 역시 세다. ‘대통령직이 처음’이라고 했던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대선 1호 공약인 자영업자 손실 보상을 위해 62조원의 역대 최대 규모의 추경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켰다. 미국처럼 기후변화 대응과 첨단산업 발전을 위한 산업정책적 고려를 담았다고 보기도 힘들다. 주로 현금보상이었고 미래 대비가 아니라 과거 손실 메워주는 데 들어갔다.

IRA는 말 그대로 인플레이션 감축에 효과가 있을까. 법안 이름과 달리, 장단기 물가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는 평가가 많다. 투입 규모도 작고 에너지·식품·주택 등이 물가 인상의 주원인이어서다.

하지만 재정건전성에 미치는 장기적 효과는 인정받고 있다. 향후 10년간 3000억 달러 정도의 재정적자를 줄일 수 있다는 분석이다. 3년간 연평균 10억 달러 이상의 이익을 내는 기업은 재무이익의 최소 15%를 납부하도록 하는 대체 최저법인세율(corporate alternative minimum tax) 덕분이다. 미국의 법인세율은 21%지만 기업들이 각종 공제제도와 조세 허점을 이용해 15% 미만의 세금을 내고 있어 150~200여 개 대기업은 세금을 더 내게 될 전망이다.

한국의 내년 세제개편안에는 법인세 최고세율을 25%에서 22%로 인하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법인세를 인하해도 여전히 미국보다 높다. 하지만 미국의 갑작스러운 대기업 증세 유턴으로 국회에서 넘어야 할 고개가 더 가팔라졌다. 이미 야당은 법인세 인하에 반대하고 있다.

새 정부는 건전재정을 강조하며 내년 예산을 올해 추경을 포함한 총지출(679조원)보다 대폭 줄이겠다고 한다. 올해 예산은 두 차례 추경으로 79조원이 늘어나 지난해 총지출(600조원)보다 이미 13%나 급증한 규모다. 추경은 예산 편성시 고려할 수 없었던 여건 변화로 불가피하게 추가된 예산이다. 추경을 포함한 올해 총지출보다 내년 예산이 많이 줄어드는 건 당연한데 이를 갖고 허리띠 졸라맸다고 정부가 내세울 일은 아니다. 재정 당국은 건전재정 의지를 제대로 보여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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