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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명 이끌며 항일투쟁 "조선 짠다크"...73년만에 유공자 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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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였던 여성 항일독립운동가 김명시(1907~1949) 장군이 사후 73년 만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국가보훈처는 지난 12일 제77주년 광복절 맞아 독립운동가 303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하면서 김명시 장군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고 14일 밝혔다.

1933년 9월 조선공산당 재건 사건으로 재판받던 당시 신문에 실린 김명시 장군 모습. 사진 열린사회희망연대

1933년 9월 조선공산당 재건 사건으로 재판받던 당시 신문에 실린 김명시 장군 모습. 사진 열린사회희망연대

“조선의 짠타크” 2000명 이끌며 항일무장투쟁


“부하 2000명을 가지고 항일전에 활동하여 무훈을 세운 연안독립동맹(조선독립동맹)의 여장군 김명시는 수일전에 개선 귀국”

1945년 12월 23일자 동아일보 1면에 실린 기사 내용이다. 이 기사에서 김 장군은 “조선의 짠타크(잔다르크)”로 표현됐다. 해방 후 다른 언론들도 “여장군”이라 칭하며 그의 항일투쟁기를 전했다.

옛 경남 마산(현 창원)에서 태어난 장군은 18살이던 1925년 가입한 고려공산청년회에서 유학생으로 선발, 소련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공부했다. 이 대학은 코민테른(공산당 국제조직) 산하 공산주의 혁명가 양성기관이었다.

김 장군은 유학 1년여 만인 1927년 중국 상해로 파견돼 중국공산당 상해한인지부에서 일하며 홍남표·조봉암 등과 함께 항일운동을 했다. 일제 만주침략이 임박했던 1930년에는 무장대와 함께 하얼빈 일본영사관을 공격했다.

김명시 장국의 개선 귀국 내용이 담긴 1945년 12월 23일자 동아일보 기사. 제목 중 ″조선의 짠타크(잔다르크) 현대의 부랑인 연안서 온 김명시 여장군 담″(빨간 동그라미)이라고 적혀 있다. 사진 국사편찬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기사 원문 캡처

김명시 장국의 개선 귀국 내용이 담긴 1945년 12월 23일자 동아일보 기사. 제목 중 ″조선의 짠타크(잔다르크) 현대의 부랑인 연안서 온 김명시 여장군 담″(빨간 동그라미)이라고 적혀 있다. 사진 국사편찬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기사 원문 캡처

이후에는 상해로 돌아와 비밀기관지 ‘콤뮤니스트’ 제작 등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나섰다. 그러다 1932년 국내에 잠입, ‘콤뮤니스트’, ‘태평양노조’ 등 비밀기관지를 인쇄·배포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조봉암 등과 ‘조선공산당 재건 사건’ 주모자로 몰리면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예심 기간 1년을 포함, 신의주 형무소(교도소)에서 7년의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39년 만기 출소한 뒤 중국으로 국경을 넘어가 중국공산당 팔로군에 입대해 싸우다 무정 장군의 연락을 받고 조선의용군에 합류했다. 여기서 화북지대 여성부대 지휘관을 맡아 전투와 선전전을 벌이며 해방 전까지 항일무장투쟁을 했다. 이때 ‘여장군’ 칭호를 얻었다.

김명시 장군은 해방 후 국내에서 신탁통치 반대 활동을 했다.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체포돼 1949년 10월 부평경찰서 유치장에서 생을 마감했다. 당시 정부는 김 장군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밝혔다.

김명시 장군의 사망 내용을 담은 1949년 10월 11일자 경향신문 기사. 제목에 ″북로당 정치위원 김명시, 유치장서 자살″이라고 적혀 있다. 사진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기사 원문 캡처

김명시 장군의 사망 내용을 담은 1949년 10월 11일자 경향신문 기사. 제목에 ″북로당 정치위원 김명시, 유치장서 자살″이라고 적혀 있다. 사진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기사 원문 캡처

독립유공자 서훈의 걸림돌 ‘북로당 정치위원 기록’

창원지역 시민단체 열린사회희망연대(희망연대)는 2019년 1월 장군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했지만, 정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가보훈처는 같은 해 11월 “사망경위 등 광복 후 행적 불분명”하다고 했다.

희망연대는 사망 당시 내무부가 장군의 이력을 ‘북노당 정치위원’이라고 발표한 것이 걸림돌로 작용한 것으로 판단했다. 실제 보훈처는 희망연대가 2021년 재심의 요청한 건에 대해 “1949년 김명시 선생이 모종의 혐의로 부평경찰에서 유치되었고 북노당 정치위원으로 소개되었던 점과 관련해 선생의 마지막 활동이 확인되는 1947년 11월부터 사망 시까지의 행적에 대해 보다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회신했다.

시민단체 “김명시 북로당에 정치위원 아니다”

희망연대는 북로당 정치위원 이력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작업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국토통일원(현 통일부)이 갖고 있던 북조선로동당 창립대회(1946년8월), 2차대회(1948년3월) 회의록을 확보해 북로당에는 ‘정치위원’란 직책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해당 자료에는 중앙위원, 검열위원 등 직책과 중앙위원회, 검사위원회 조직은 있지만, 정치위원이나 정치위원회는 기록돼 있지 않았다. 게다가 해당 자료 명단에 김두봉·김일성 등 이름은 있지만 김명시는 없단 사실도 확인했다.

1925년 모스크바 유학 전 김명시 장군(액자사진 오른쪽)과 동생 김형윤이 함께 찍은 사진을 들고 김영만 열린사회희망연대 상임고문이 김 장군의 공적을 설명하고 있다. 안대훈 기자

1925년 모스크바 유학 전 김명시 장군(액자사진 오른쪽)과 동생 김형윤이 함께 찍은 사진을 들고 김영만 열린사회희망연대 상임고문이 김 장군의 공적을 설명하고 있다. 안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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