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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필규의 아하, 아메리카

유럽 명품 쓸어담는 미국인들…달러 스마일, 세계는 울고싶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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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김필규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김필규 워싱턴특파원

김필규 워싱턴특파원

미국 버지니아에 사는 교포 김지선 씨는 최근 한국을 다녀온 뒤 오히려 “돈을 벌고 온 기분”이라고 했다.
지난해만 해도 달러당 1000원 가까이 떨어졌던 원-달러 환율은 지난 6월 1300원을 넘었다. 10만원 어치 물건을 사도 예전엔 93달러 정도였던 게 이제는 77달러 정도라고 생각하니 지갑을 여는 마음이 훨씬 가벼웠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 등으로 달러화의 가치가 상승, 지난달 '1달러=1유로'로 20년만에 처음으로 두 통화의 가치가 똑같아졌다. [로이터=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 등으로 달러화의 가치가 상승, 지난달 '1달러=1유로'로 20년만에 처음으로 두 통화의 가치가 똑같아졌다. [로이터=연합뉴스]

유럽을 다녀온 미국인들도 마찬가지다. 달러보다 비싼 게 당연한 듯했던 유로화 가치는 지난해부터 쭉쭉 떨어지더니, 급기야 지난달 ‘1달러=1유로’가 됐다. 달러와 유로화 가치가 같아진 것은 2002년 이후 처음이다.

나홀로 ‘달러 스마일’ 언제까지 

그러자 유럽 여행을 가고 명품이나 고급 와인을 사는 미국인들이 급증했다고 CNN 등이 보도했다. 보험사 알리안츠가 지난 6월 펴낸 자료에 따르면 올해 유럽 여행을 떠나는 미국인의 숫자는 지난해보다 600%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19가 끝나가는 영향이 크겠지만, 유로화 대비 가치가 15%나 오른 ‘강달러’도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일부 부유층 사이에선 프랑스에서 ‘저택 쇼핑’을 하는 것도 유행이라고 했다.

전 세계 경제가 휘청이는 상황에서, 미국만 홀로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이른바 ‘달러 스마일’ 현상 때문이다. 달러는 세계 경제가 위기에 처했을 때도, 미국 경제가 좋을 때도 강해진다는 것으로, 모건 스탠리의 통화 전략담당이던 스티븐 젠이 제시한 이론이다.

가로축을 미국 경제 상황, 세로축을 달러 가치로 했을 때, 경제가 매우 나쁜 상태에서 매우 좋은 때로 가는 동안 자연스럽게 양쪽 입꼬리가 올라가는 모습의 곡선을 그린다. 그래서 ‘달러 스마일’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실제 지난달 달러인덱스(DXY)는 107까지 올랐다. 엔·유로 등 주요 6개국 통화와 비교해 달러가 얼마나 센지 나타내는 지수인데, 20년 만에 최고치였다.

강달러 현상의 이유로 대부분 경제학자는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연준)의 공격적인 기준금리 인상을 꼽는다. 기준금리 인상으로, 그렇지 않아도 안전자산으로 여기는 미국 채권 금리까지 오르니 전 세계 돈이 몰리는 것이다.

여기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천연가스값이 치솟고 유럽 경제가 타격을 받아 상대적으로 미국 경제가 건전해 보이게 된 것 역시 강달러에 한몫했다”고 케니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경제학)는 분석한다.

개도국은 울상…국가부도까지

하지만 ‘스마일’하는 달러와 달리 세계 경제에는 웃을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달러 가치가 오르면서 다른 나라들은 달러로 진 빚을 갚고 수입한 물건의 대금을 지급하는 데 더 많은 자국 통화를 동원할 수밖에 없게 됐기 때문”(다우다 셈베네 전 국제통화기금 국장)이다.

특히 대외의존도가 높고 자국 통화가치가 급격히 떨어진 개발도상국은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됐다. 지난 5월 달러가 바닥난 상황에서 부채 상환 시기까지 닥쳐 결국 국가 부도를 피하지 못한 스리랑카가 대표적이다.

지난 4월 국가부도를 선언한 스리랑카에서 대학생 수천명이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수도 콜롬보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지난 4월 국가부도를 선언한 스리랑카에서 대학생 수천명이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수도 콜롬보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한국 역시 강달러에 타격이 불가피하다. 가뜩이나 물가가 치솟는데 고환율 탓에 수입품 가격이 올라 인플레이션은 더 나빠질 수도 있다. 환율을 진정시키기 위해 함께 올린 기준금리는 가계의 부채 부담을 키운다.

물론 수출기업 입장에선 원화가치가 떨어지면서 더 싸게 미국 시장에 물건을 내다 팔 수 있어 가격 경쟁력을 높이는 긍정적 측면도 있다. 그래서 현재 한국의 경제 체력이나 외화보유액, 성장률 등으로 볼 때 아직은 과거 외환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상하긴 이르다는 전망도 있다.

김석원 한국은행 워싱턴주재 소장은 “중요한 것은 한국 경제를 믿지 못한 투자 자금이 빠르게 빠져나가느냐 여부인데, 현재는 과거 위기 때와는 다른 상황”이라고 말했다.

경기침체로 강달러 끝나도 문제  

전문가들은 강달러 시대를 끝낼 두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일단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이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깊어진 에너지난이 해소되고, 유럽 경제의 불확실성이 사라져 유로화가 강세로 돌아서면 달러화에 대한 인기가 식을 수 있다.

또 하나는 큰 폭의 기준금리 인상을 이어가던 미국 경제가 결국 침체로 돌아서는 것이다. 많은 경제학자의 예상대로 내년에 경기침체가 오면, 연준은 기준금리를 내릴 수밖에 없다. 미국 내 자산이나 기업에 대한 매력을 잃은 해외 투자자들의 돈이 빠져나가면서 자연스럽게 달러 가치도 떨어지는 시나리오다.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연준) 의장은 지난 6월 기준금리를 한꺼번에 0.75%포인트 올리는 '자이언트 스텝'을 발표했다. 연준의 급격한 기준금리 인상으로 일부 경제학자들은 이르면 올해 말이나 내년 초 미국의 경기침체가 올 거라고 예상한다. AP=연합뉴스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연준) 의장은 지난 6월 기준금리를 한꺼번에 0.75%포인트 올리는 '자이언트 스텝'을 발표했다. 연준의 급격한 기준금리 인상으로 일부 경제학자들은 이르면 올해 말이나 내년 초 미국의 경기침체가 올 거라고 예상한다. AP=연합뉴스

하지만 너무 급격한 경기침체는 또 다른 충격을 가져올 거란 경고도 나온다. 개도국 입장에선 그나마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인 미국 경제가 버티면서 수출하며 자신들도 버텼던 것인데, 미국 경기침체로 이마저 막힐 수 있기 때문이다. 스위스 투자은행 UBS의 신흥시장 담당 매닉 너레인은 “(수출이라는) 한 가닥 희망의 끈마저 사라지면서 시장에 더 큰 고통이 찾아올 수 있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