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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범죄' '등' 무슨 뜻?…허술한 입법이 부른 시행령 논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법무부가 지난 11일 입법 예고한 ‘검사의 수사개시 범죄 범위에 관한 규정’(검찰청법 시행령) 개정안을 둘러싸고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논란의 핵심 중 하나는 검사에게 수사개시 권한을 준 부패범죄, 경제범죄를 무엇으로 볼 것이냐다. 현행 검찰청법은 검사의 수사개시 권한을 6대(부패·경제·공직자·선거·방위사업·대형참사) 중요범죄로 제한하고 있는데, 개정 검찰청법은 이를 2대(부패·경제) 중요범죄로 축소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지난 4월 강행한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입법의 결과물이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지난 11일 정부과천청사에서 '검수완박' 입법을 무력화하는 '검사의 수사개시 범죄 범위에 관한 규정' 개정안을 직접 발표했다. 사진은 지난 12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광복절 특별사면에 관해 브리핑하는 한 장관의 모습. 뉴스1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지난 11일 정부과천청사에서 '검수완박' 입법을 무력화하는 '검사의 수사개시 범죄 범위에 관한 규정' 개정안을 직접 발표했다. 사진은 지난 12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광복절 특별사면에 관해 브리핑하는 한 장관의 모습. 뉴스1

공직자범죄도 포함?…애매한 ‘부패범죄’ 정의 

14일 법조계에 따르면 이번 논란은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부패범죄’ ‘경제범죄’에 해당하는 범죄를 현행 대통령령과 다르게 정비하면서 불거졌다. 기존 공직자범죄, 선거범죄에 해당하는 범죄 일부를 부패범죄로 편입시키면서다.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직무유기, 허위공문서작성 및 행사, 공직선거법상 매수 및 이해유도, 기부행위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 ‘검수완박’을 주도한 민주당은 “입법 취지를 무시하고 검찰청법이 위임한 한계를 형해화한 것”이라며 “전(前) 정권에 대한 합법적 정치보복을 위해 검찰 수사의 법적 근거를 마련한 것”(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민주당 의원들)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부패범죄’ ‘경제범죄’는 법률용어가 아니다. 검사가 수사를 개시할 수 있는 범죄 범위를 제한하기 위해 입법권자들이 만든 용어로, 이 때문에 국회는 검찰청법을 개정하면서 하위법령인 시행령을 통해 범죄 범위를 구체화하도록 했다. 지난 4월 법사위 소위의 검찰청법 개정안 논의 과정에서도 추상적인 용어 때문에 그 범위가 무한정 확장될 수 있다는 지적이 국민의힘과 민주당 양측에서 공히 나왔다. 현행 검찰청법은 형법상 직권남용 등 공직자의 직무에 관한 범죄를 ‘공직자범죄’라는 단어로 묶었지만,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이 지난해 8월 발간한 『한국의 범죄현상과 형사정책(2020)』은 공직자(공무원)범죄를 대표적인 부패범죄(직권남용·직무유기·수뢰·증뢰 등)로 소개하고 있다.

기동민 간사 등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지난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법무부가 입법예고 한 '검사의 수사개시 범죄 범위에 관한 규정' 개정안에 대해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기동민 간사 등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지난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법무부가 입법예고 한 '검사의 수사개시 범죄 범위에 관한 규정' 개정안에 대해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경찰 역시 직권남용과 직무유기 등을 부패범죄로 규정하고 있다. ‘경찰청과 그 소속기관 직제 시행규칙’에 따르면 국가수사본부 수사국 반부패·공공범죄수사과장이 수사를 지휘·감독할 수 있는 사항 중 하나는 ‘증·수뢰죄, 직권남용·직무유기 등 부정부패범죄 및 공무원 직무에 관한 범죄 사건’이다. 서울경찰청 반부패·공공범죄수사대장이 분장하는 정보수집·수사 사무로 ‘공무원범죄·선거범죄 등 주요 부패·공공 범죄 사건’을 규정하고 있기도 하다. 결국 원래 부패범죄인 것을 부패범죄 범주로 재편한 것일 뿐이라는 게 법무부의 주장이다. 법무부는 “현대 부패범죄의 양축은 뇌물과 직권남용이고, 직권남용이나 허위공문서작성 범행은 뇌물 등과 결합돼 하나의 사건을 구성하는 것이 부패범죄의 전형적인 유형”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논란의 핵심은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중요 범죄’라는 법 문언을 ‘부패범죄, 경제범죄와 그 외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중요 범죄’로 확장해서 해석할 수 있느냐다. 법무부는 이를 통해 무고·위증 등 사법질서 저해범죄와 개별 법률이 검사에게만 고발 또는 수사를 의뢰하도록 한 범죄를 검사의 수사개시 범위에 추가했다. 한국어의 ‘등(等)’을 ‘대상을 그것만으로 한정함을 나타내는 말’이 아닌 ‘그 밖에도 같은 종류의 것이 더 있음을 나타내는 말’로 해석한 것이다. 법안 논의 과정에서 “‘등’ 대신 ‘중’이라는 표현을 쓰자”(진교훈 당시 경찰청 차장)는 의견이 제시됐고 실제 민주당 수정안에 반영됐지만, 합의문엔 없던 내용이라는 국민의힘의 반발로 무산됐다.

법무부, 시행령 개정으로 ‘검수완박’ 무력화

법무부, 시행령 개정으로 ‘검수완박’ 무력화

“‘검수완박’ 졸속 입법에 예견된 갈등” 

이에 법조계에선 졸속으로 추진된 ‘검수완박’에 따라 입법 자체가 허술하게 이뤄지면서 벌어진 ‘예견된 갈등’이란 지적이 나온다. 국회 다수와 행정부의 견해가 일치할 땐 문제가 없었지만, 여소야대 정국에선 모호한 법 문언을 각기 달리 해석해 벌어진 일이란 것이다. 다만, 법을 집행하는 행정부가 법을 만든 입법권자의 취지와 달리 법을 해석하고 그에 따라 시행령을 만들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익명을 요구한 한 법조계 인사는 “악법(惡法)이라는 이유로 하위법을 통해 상위법의 취지를 뒤집는 건 법체계의 안정성이란 측면에서 바람직해 보이진 않는다”며 “이러한 선례가 쌓일수록 결국 부메랑이 돼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꼬집었다.

당초 검사의 수사지휘권을 규정하면서 탄생한 ‘수사개시권’ 개념을 수사지휘권이 폐지된 이후에도 합리적 근거 없이 검사의 수사권을 제한하는 용도로 사용하면서 벌어진 기형적 상황이란 분석도 있다. 정웅석 한국형사소송법학회장은 이날 페이스북에 “형사소송의 기본법인 형사소송법에는 (검사의 수사권에 관한) 아무런 제한규정이 없다는 점에서, 형사소송의 한 축인 검찰을 규정하는 검찰청법 역시 기본법인 형사소송법을 무시한 입법이나 시행령을 제정할 수 없다”며 “‘등’의 범위를 확대 내지 축소 해석하는 것은 본질적 사항이 아니다”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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