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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담배 아닌데? 액상형 전담 못 건드리는 '34살 늙은규정'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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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내의 한 전자담배 전문점에 진열된 액상. 뉴스1

서울 시내의 한 전자담배 전문점에 진열된 액상. 뉴스1

'연초(煙草)의 잎을 원료의 전부 또는 일부로 하여 피우거나, 빨거나, 증기로 흡입하거나, 씹거나, 냄새 맡기에 적합한 상태로 제조한 것'.
담배사업법 2조에서 규정하는 담배의 정의다. 올해로 34살이 된 이 규정이 현실과 동떨어지면서 법적 사각지대에 놓인 액상형 전자담배가 흡연자들을 파고들고 있다. 담배를 담배라 부르지 못 하는 '유사 담배'를 규제·관리하려면 담배사업법이 시급히 개정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재 정부가 공식적으로 판매량을 집계하는 담배 종류는 궐련과 궐련형 전자담배 둘 뿐이다. 지난달 29일 기획재정부에서 낸 상반기 담배 시장 자료엔 두 담배가 15억2000만갑, 2억6000만갑씩 팔렸다는 내용만 나왔다. 폐쇄형 용기를 쓰는 액상형 전자담배(CSV), 연초 고형물 전자담배는 지난해 판매 중단되면서 더 이상 집계하지 않는다는 설명이 담겼다.

하지만 통계 바깥엔 법망을 빠져나간 전자담배 제품이 여럿 있다. 인터넷 포털 검색만 하면 연초 잎 대신 줄기·뿌리에서 추출한 니코틴이나 화학물질을 합성한 니코틴을 쓰는 액상형 전자담배가 줄줄이 나온다. 길거리에서도 이런 제품을 쓰는 흡연자를 흔히 볼 수 있다. 법적 담배 정의에 해당하지 않는 일종의 '유사 담배'다.

하지만 정확히 얼마나 팔리는지 확인할 수 없다. 이성규 한국담배규제연구교육센터장은 "국내 전체 전자담배 제품 중 유사 담배 비율이 30~40%에 달하는 거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궐련, 궐련형 전자담배만 집계하는 정부 담배 시장 자료는 국내 담배 실태를 온전히 보여주지 못하는 셈이다.

담배사업법 2조의 담배 정의는 1988년 제정 이래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이 법에 근거해 연초 잎으로 만든 담배엔 각종 제세 부담금이 붙는다. 액상형 전자담배 니코틴 용액을 30mL 사면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쓰는데, 거기 부과되는 세금이 5만4000원 정도다. 액상 1mL에 ▶담배소비세 628원 ▶지방교육세 276원 ▶개별소비세 370원 ▶국민건강증진부담금 525원 등 1799원이 매겨진다. 이 액상의 시장 가격은 3만원 남짓으로 세금이 훨씬 비싸기 때문에 사업자들이 판매를 포기하게 된다. 그래서 전자담배 업계에선 세금 수준을 줄여달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합성 니코틴 등을 활용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법상 담배가 아니면 세금이 덜 붙으니 사용자의 가격 부담이 줄어든다. 국내에 수입, 판매하는 액상형 전자담배는 대부분 이런 제품이다. 판매량을 높이기 위해 등장한 유사담배 유통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다.

세금도 문제지만, 제일 큰 문제는 제대로 된 통계 조사나 법적 제한 없이 흡연자들의 선택을 받는 것이다. 정부가 이들 담배의 판촉 광고 등을 규제하거나 단속할 권한이 마땅치 않고, 담배 제품에 의무적으로 붙는 경고그림·문구도 적용되지 않는다. 유해물질 분석 같은 인체 안전성도 제대로 담보되기 어렵다.

무분별한 액상형 전자담배 마케팅 등은 청소년 흡연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질병관리청 청소년건강행태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액상형 전자담배를 사용하고 있다는 청소년 비율은 남학생 3.7%, 여학생 1.9%였다. 1년 새 남학생은 1%포인트, 여학생은 0.8%포인트씩 늘면서 급상승했다. 액상형 제품을 경험해본 청소년 비율도 2020년 6.1%에서 2021년 7.1%로 늘었다. 유사담배를 얻기 위해 '댈구'라는 은어로 불리는 대리구매 등도 끊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유사 담배도 담배 정의에 포함하려는 담배사업법 개정안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최혜영·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2년 전 각각 대표발의한 법안들은 국회 기재위에 여전히 계류 중이다. 국회 관계자는 "발의 초반엔 논의가 있었지만, 최근엔 별다른 진전이 없는 상황이다. 정부도 증세 이슈를 의식해서인지 적극적이지 않다"라고 말했다.

정부 부처 간에도 법 개정을 두고 온도 차가 뚜렷하다. 기재부 관계자는 "유사 담배 비율이 미미한 데다 법 개정은 담배 시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만큼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담배 정의를 시급히 바꿔야 단속도 명확히 할 수 있고, 제세부담금도 강력하게 매길 수 있다"고 말했다.

복지부는 지난해 12월부터 국민건강증진법 시행령상 '잎담배' 용어를 '연초'로 바꾸고, '담배'도 '담배와 이와 유사한 형태의 담배'로 수정했다. 지방세법도 마찬가지로 연초 뿌리·줄기 등을 활용한 제품도 담배로 규정하고 있다. 그나마 관련법을 손질해 유사담배에 국민건강증진부담금 등 제세부담금을 매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니코틴 성분을 일부러 뺀 액상을 판매하는 등 세금 회피 방법은 계속 나오고 있다. 무(無)니코틴 액상은 현행법상 담배가 아닌 의약외품으로 분류된다.

결국 담배사업법이 바뀌어야 유사 담배도 담배와 동일한 수준의 규제가 적용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성규 센터장은 "정부·국회 등이 적극 나서서 담배사업법 2조부터 개정해야 한다. 이대로 가면 주무 부처 간에 계속 책임을 회피할 뿐 아니라 유사 담배 시장에 대한 판매·광고 규제조차 어려워 금연 정책이 흔들리고 국가 세수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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