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반도체·배터리 중국 견제 대못…G2에 끼인 한국 난감

중앙선데이

입력 2022.08.13 00:53

업데이트 2022.08.13 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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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1호 10면

미 ‘글로벌 공급망 재편’ 파장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9일(현지시간) 백악관 잔디밭에서 반도체 산업육성법에 서명한 뒤 법안을 들어보이고 있다. 이 법은 미국 반도체 산업을 위해 향후 5년간 총 2800억 달러(약 366조원)를 투자하는 것이 골자다. [로이터=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9일(현지시간) 백악관 잔디밭에서 반도체 산업육성법에 서명한 뒤 법안을 들어보이고 있다. 이 법은 미국 반도체 산업을 위해 향후 5년간 총 2800억 달러(약 366조원)를 투자하는 것이 골자다. [로이터=연합뉴스]

210억 달러(약 27조원). 최근 미국 의회를 통과한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이 향후 5년간 줄일 것으로 추정되는 미국 정부 예산 규모다. 미국 의회 예산국(CBO)에서 분석한 이 금액은 같은 기간 미국 GDP의 0.018%에 불과하다. 정부 지출을 줄여 인플레이션을 낮추겠다는 법안의 취지가 의심받는 대목이다. 민간 평가는 더욱 가혹하다. 미국 펜실베니아대 와튼스쿨의 펜와튼예산모델(PWBM)에선 오히려 향후 5년간 정부 지출이 614억 달러(약 80조원) 늘어날 것이라 추정한 뒤, IRA가 인플레이션에 미칠 영향은 “인식할 수 없을 만큼 미미한 수준”이라 평가했다.

세간이 평가가 이렇다 보니 IRA의 진짜 목적은 인플레이션 감축이 아니라 공급망 재편이라는 해석에 무게가 쏠린다. 법안의 골자는 2030년까지 기후변화 대응에 3690억 달러(약 481조원)를 투입하고, 대기업에 최소 15%의 법인세를 부과해 재원을 마련하는 내용인데 이 과정에서 중국을 철저히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 법안에 따르면 미국 내에서 조립·생산한 전기차를 구매하는 경우에만 세액 공제 혜택을 부여하는데, 이 과정에서 중국이 비집고 들어올 틈을 남겨두지 않았다. 전기차의 핵심 부품인 배터리는 물론 배터리의 원료가 되는 주요 광물도 미국이나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를 맺은 나라에서 채굴해 생산한 것을 사용해야 한다. 중국산 전기차는 말할 것도 없고 중국산 부품을 쓴 전기차는 세제 혜택을 받을 수 없다. 배터리 공급망 전반을 사실상 미국 안으로 재편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셈이다.

중국 “공급망 왜곡, 국제무역 교란할 것”

미국의 공급망 재편 의지를 담은 법안은 이 뿐만이 아니다. 지난달 미국 상·하원을 통과한 ‘반도체 산업육성법(Chips and Science Act)’도 중국을 배제하고 있다. 이른바 ‘가드레일 조항’이 담긴 것이다. 이 법안에선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는 기업에 세액 공제 혜택을 제공한다. 대신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은 기업에게는 향후 10년간 중국에 반도체 투자를 금지하고 있다. 법안에서 명시적으로 중국을 배제한 것만큼이나 직접적인 언급도 나왔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9일(현지시간) 반도체 산업육성법에 서명하면서 “중국 공산당이 법안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로비에 나서기도 했다”며 이 법안이 중국에 위협적이란 점을 강조한 뒤 “미래 반도체 산업은 미국 안에서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이 경쟁국을 자극할 만한 발언을 내놓은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서방 언론들은 21세기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행보가 분명해지고 있다고 평가한다. 미국의 의지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지점은 시스템반도체 제조의 중심지인 대만이다. 기디언 래치먼 파이낸셜타임즈(FT) 수석칼럼니스트는 최근 칼럼에서 “과거 바이든 대통령은 중국이 침공할 경우 미국이 대만을 지키기 위해 싸울 것이라고 세 번이나 말했는데, 이는 미국의 공식 문법인 ‘전략적 모호성’에서 벗어난 발언”이라며 “대만의 운명이 21세기 힘의 균형을 결정지을 것이란 워싱턴 정가의 믿음을 반영한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에서 대만에 ‘21세기 패권’을 걸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가 뭘까. 미국 내에선 반도체와 배터리가 단순히 고부가가치 상품이 아닌, 석유를 대체할 글로벌 패권의 원천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미국에선 반도체를 두고 ‘21세기 버전의 전략적인 화석 연료’라 지칭한 펫 갤싱어 인텔 최고경영자의 표현이 자주 인용된다. 배터리 역시 마찬가지다. 글로벌 투자은행(IB) 모건스탠리는 배터리를 두고 ‘지난 100년을 지배한 에너지 공급망을 재편하는 제2의 석유’라고 평가했다.

그래픽=남미가 nam.miga@joongang.co.kr

그래픽=남미가 nam.miga@joongang.co.kr

이런 배경에서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재임 시기부터 중국 견제에 본격적으로 나선 바 있다. 그리고 바이든 대통령의 행보는 전임 행정부와 맞닿아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김흥규 아주대 미중연구소장은 “바이든 행정부가 추진하는 것은 전략적 품목에서 중국의 산업과 기술 발전을 억제하는 전략”이라며 “트럼프 행정부 시절 대 중국 무역제재에 들어갔지만 생각보다 중국 경제의 회복탄력성이 강했던 탓에 이제는 동맹국들과 함께 중국에 대응하는 역량을 갖추고자 하는 게 핵심”이라고 말했다.

난처한 것은 한국 기업들이다. 반도체와 배터리 산업은 한국의 주요 기업들이 포진해 있어 한국 경제에 명운이 걸렸다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인데 한국의 교역 1위국인 중국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있다. 지난 10일 왕원빈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미국의 반도체 산업육성법이 공포된 직후 “세계 반도체 공급망을 왜곡시키고 국제 무역의 교란할 것”이라며 “어떤 규제도 중국 과학기술 발전과 산업의 진보를 막을 수 없다”고 밝혔다. 중국 정부는 그동안 노골적으로 한국이 미국 주도의 칩4동맹에 가입하지 말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중국은 한국의 반도체 최대 수입국이다.

반면 미국에선 한국의 대표 반도체 기업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향한 구애가 반복되고 있다. 바꿔 말하면, 반도체 시장의 분업 체계에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글로벌 반도체 시장은 미국의 기술과 설계(팹리스) 아래 대만과 한국 기업들이 각각 시스템반도체와 메모리반도체를 제조하는 분업 체제였으나, 반도체 산업육성법은 미국 내 설비 투자를 요구하는 상황이다. 존 코닌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은 “미국이 첨단 반도체 공급에서 멀어지면 미국 GDP는 3.2%까지 줄어들고, 연간 240만개의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고 예측한 바 있다. 한국 기업들이 미국으로 생산기지를 옮길 경우 이에 버금가는 양질의 일자리가 한국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 대만과 일본 등 인접국 사이에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것도 부담이다. 이들 국가들은 당장 자국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일본만 하더라도 지난 5월 출범한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에서 중국을 배제하지 않도록 미국을 설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 안으로 들어가려 움직이는 한편에선 중국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액션을 취한 것이다. 김영우 SK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일본의 지금까지 행보에 비춰보면 반도체 제조가 강점인 한국을 칩4동맹에서 밀어내는 한편, 중국과는 관계를 유지해 자국 소재·부품·장비 기업들의 영향력을 높이고 싶어한다”며 “우리 역시 중국의 반발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미국엔 한국이 중요한 국가라는 것을 인식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 배터리 산업도 마찬가지다. 배터리 산업은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 SK온 등이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고 있다. 여기에 배터리가 필수적인 전기차 시장의 현대·기아차를 포함하면 국내 4대 그룹 모두가 배터리 공급망에 노출된 셈이라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반도체 산업 못지 않다. 이들 기업들은 과거 중국 정부가 자국산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지급하자 중국 시장에서 밀려난 경험이 있다. 전기차의 특성상 정부 지원금의 영향력이 그만큼 절대적인 것이다. 동일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미국은 지난해에만 전기차 67만대가 판매된 세계 2위 시장이다.

국내 4대 그룹 모두 리스크에 노출

미국 시장을 놓칠 수 없는 국내 배터리 기업들은 이미 북미 지역에 생산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문제는 배터리 원료와 소재다. 국내 배터리 3사 모두 배터리 핵심 4대 소재(양극재·음극재·분리막·전해질) 납품업체에 중국 기업들을 포함하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으로부터의 수입 규모도 증가 추세다.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국내 기업들은 전기차 배터리 원료(리튬·니켈·망간·코발트 등) 72억5000만 달러(약 9조4250억원)어치를 중국으로부터 들여왔다. 지난해 같은 기간 기록한 38억3000만 달러(약 4조9790억원)에 비해 두 배에 가까운 규모다.

이 같은 상황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란 점이 기업 차원의 대안 마련을 어렵게 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전기차 배터리의 양극재와 음극재 시장에서 중국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70%, 85%에 이른다. 한 배터리 업체 관계자는 “희토류를 비롯한 핵심 원료 시장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영향력이 높은 데다, 환경오염 이슈가 복잡하게 걸려 있어 중국을 대체할 국가가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며 “미국 시장을 공략하려는 글로벌 업체들이 일제히 공급망에 변화를 줄 경우 비용 부담이 만만찮을 것”이라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직 고위관료는 “한국 기업들은 미국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데 미국 기준에 맞추면 중국의 보복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우리 기업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정부가 미국과 중국을 설득해 예외조항을 허용하도록 노력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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