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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시력 잃어 초점 흔들린 풍경, 감정은 더 많이 담겨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01호 19면

필립 퍼키스 사진전

사진가 필립 퍼키스가 2007년 왼쪽 시력을 잃은 후, 처음으로 자동카메라를 이용해 촬영한 사진 12점이 류가헌에서 첫 선을 보인다. [사진 필립 퍼키스]

사진가 필립 퍼키스가 2007년 왼쪽 시력을 잃은 후, 처음으로 자동카메라를 이용해 촬영한 사진 12점이 류가헌에서 첫 선을 보인다. [사진 필립 퍼키스]

8월 2일부터 21일까지 서울 청운동에 있는 갤러리 류가헌에서 ‘사진가들의 사진가’로 불리는 필립 퍼키스의 사진전 ‘필립 퍼키스 12장의 사진-해질녁’이 진행중이다.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 사진과 교수로 40년간 재직하며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그에게 ‘사진가’보다 더 익숙한 호칭은 ‘선생님’ 또는 ‘스승’이다. 뉴욕 대학교,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 쿠퍼 유니온 등에서 사진을 강의하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워크샵을 열었던 그다.

그에게 ‘스승’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이유는 또 있다. 수십 년간의 사진 강의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책 『사진강의 노트』, 사진집 『워릭 마운틴 시리즈』 『인간의 슬픔』 『한 장의 사진, 스무 날, 스무 통의 편지』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 『멕시코』 등을 통해 퍼키스는 한 장의 사진을 ‘보는’ 데 머물지 않고 어떻게 ‘이해하고’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끊임 없이 이야기해왔다. 그가 사진가들의 스승이자, 사진을 사랑하는 관객들에게도 위대한 스승인 이유다.

필립 퍼키스

필립 퍼키스

필립 퍼키스의 제자로서 꾸준히 스승의 책과 사진집을 출판하고 이번 전시도 준비한 출판사 ‘안목’의 박태희 대표는 “특정 장르의 사진가로 정의되길 정말 싫어하는 분”이라고 소개했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풍경·인물 등을 많이 찍으셨고 그래서 ‘거리 사진의 대가’라고도 불리지만 선생님은 당신의 사진이 어떤 장르에 갇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신다. 사진가가 할 일은 ‘본다’는 행위를 어떤 특별한 사건이나 스토리로 전달하기보다, 보는 순간 느낀 정신적·감정적 동요 자체를 전달하는 일이라고 늘 말씀하셨다. 기계적으로 일상을 반복하고 있는 현대인들이 어느 한 순간만이라도, 가령 사진을 찍는(보는) 순간만이라도 어떤 동요를 느껴 깨우침을 얻길 바라기 때문이다.”

이번 사진전은 불교 구도자를 연상시키는 필립 퍼키스의 철학을 또 한 번 떠올리게 하는 자리다. 퍼키스는 2007년 망막 폐색증으로 왼쪽 시력을 잃었다. 반세기 동안 카메라 파인더를 들여다보던 바로 그 눈을 잃은 것. 이후 3개월 동안 그는 “나의 왼쪽 눈”이라고 부르던 라이카 카메라로 더 이상 초점을 맞출 수 없었다. 결국 생전 처음 자동카메라를 구입했고, 반경 100미터 이내 해질녘 풍경을 첫 촬영지로 삼았다. 그 기록이 이번 사진전에 걸린 12장의 작품이다.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흑백사진 속 풍경들은 특별하지 않다. 어딘가 초점도 흔들려 보인다. 그런데 그 고요함 속에서 잔잔한 파동이 느껴진다. 퍼키스 또한 이 12장의 사진을 직접 인화해서 포트폴리오 상자에 따로 담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오른쪽 눈으로 촬영한 사진들은 이전 사진보다 감정이 많이 담긴 것 같다.”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게 된 87세 노 사진가는 그 순간, 어떤 감정의 동요를 느꼈을까.

이번 사진전 작품들은 국내에서 최초로 공개되는 사진들이자 늘 모든 사진을 직접 인화해온 퍼키스가 더 이상은 암실작업을 이어갈 수 없다는 점에서 다시 만나기 어려운 귀한 사진들이다. 전시는 서울 전시 이후 새로 개관한 부산 달맞이길의 안목갤러리로 이어질 예정이다.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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