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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석상 모아이의 섬 왜 몰락했나...지식성장 가능하려면[BOOK]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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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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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바뀔 수도 있습니다 
데이비드 도이치 지음
김혜원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거대한 석상(모아이)으로 유명한 남태평양의 이스터 섬. 주민들은 석상을 세우느라 나무를 잘라냈고, 숲이 사라진 섬은 토양 침식 탓으로 농사짓기가 힘들어졌다. 주민들은 장거리 항해 방법을 알지 못했다. 황폐해진 섬을 떠날 수 없었던 그들은 굶주릴 수밖에 없었다. 숲보다 석상 만드는 것을 더 중시하는 문화, 억압적이고 정적인 사회는 새로운 지식을 쌓기 어려웠다. 환경 파괴라는 새로운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전무했다.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수학하고, 옥스퍼드대학 물리학 교수를 지낸 저자는 지금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기후 위기까지도 지식의 성장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낙관한다. 주변 환경을 '자원'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지식뿐이고, 지식을 더 나은 것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인간뿐이라는 것이다. 인류의 창의성 덕분이다.

'모아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석상들이 늘어선 남태평양의 이스터섬. (AP Photo/Karen Schwartz, File) FILE PHOT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모아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석상들이 늘어선 남태평양의 이스터섬. (AP Photo/Karen Schwartz, File) FILE PHOT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저자는 지식 발전은 무한하다고 거듭 강조한다. 원시 형태의 지식은 어느 순간 편협함을 벗어나 보편성을 갖는 상태로 도약하게 되고 무제한 성장을 시작하게 된다. 그 도약의 순간을 일컫는 '무한의 시작(beginning of infinity)'은 이 책의 원제이기도 하다.

일단 성장의 궤도에 진입한 지식은 토머스 쿤이 말한 '패러다임(paradigm)의 전환'을 겪게 된다. '나쁜 설명'에 기반을 둔 지식은 도태돼 사라지고 실체적 진실을 추구하는, 더 '좋은 설명'을 가진 지식만 살아남는다. 좋은 설명은 논리적 일관성과 구조적 통일성을 갖고 있어 다른 설명과 분리되지 않고, 많은 것을 포괄할 수 있다.

그렇게 지식은 진보하고, 지식이 품을 수 있는 범위도 점점 넓어진다. 진리도 바뀔 수 있다는 게 그런 의미다.

물론 이런 진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다. 좋은 설명을 찾은 것은 그 시대의 정신이고, 기존의 설명도 사람의 추측과 검증을 통해 개선할 수 있다. 과학이 과학일 수 있는 것은 객관적 검증이 가능하고, 틀릴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좋은 설명이 나오면 얼마든지 갈아탈 마음의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올바른 과학적 설명이 없는 '창조론'은 진정한 지식의 창조를 방해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책에서는 부족한 지식이 보편성을 얻고 '무한의 시작'에 돌입해 빠르게 발전한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창조론을 딛고 나온 다윈의 진화론이 다시 신다윈주의로 이어진 것, 활자 인쇄의 발명, 아라비아 숫자가 로마 숫자를 대체한 경우가 그런 예다. 아날로그 계산기 기술이 디지털 계산기로, 컴퓨터로 이어졌고, 인공지능(AI)으로 진보하고 있다. 다중우주 이론이 나온 배경도 그런 맥락에서 설명한다.

자연과학 외에도 꽃의 아름다움이나 예술·문화, 정치 체제까지도 진보가 가능하고 이를 유전자의 진화로, 혹은 문화적 유전자라고 하는 밈(meme)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원숭이도 도구를 사용하고 고구마를 물에 씻어 먹는 밈을 만들어내지만, 인간만이 밈을 지속해서 개선하는 것은 창조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저자는 마르크스·엥겔스와 『총·균·쇠』의 저자 재러드 다이아몬드를 싸잡아 비판한다. 문명의 진보를 결정하는 것은 생각·지식이고, 생물지리학적인 요인이나 환경이 인류의 진보를 가로막는 역할을 언제까지 지속할 수는 없다고 봤다.

책 '진리는 바뀔 수도 있습니다'의 저자 데이비드 도이치. [사진 알에이치코리아]

책 '진리는 바뀔 수도 있습니다'의 저자 데이비드 도이치. [사진 알에이치코리아]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지식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 시스템이다. 지식의 진보를 위해서는 권위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야 하고, 좋은 설명을 추구하는 비판적 전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경험주의라는 도그마(dogma·독단적인 교리)를 거부해야 하고, 지식의 진보를 억압하는 정적인 사회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창조적 사고가 없는 상태의 다른 이름은 바로 '죽음'이다. 우리 주변에서도 사실이 모여 진실을 이루지만, 그 진실조차도 많은 경우 현실의 벽 앞에서는 힘을 못 쓴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저자는 지식의 무제한 성장에 대해 강한 낙관론을 펴고 있다. 만일 미래의 선택이 현재보다 나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현재의 정책과 제도를 가능한 한 바꾸지 않으려고 할 것이고, 그런 사회는 결국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식이 한계 없이 성장하기를 기대하는 사회만이 진보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런 '기술 낙관론'에 대해 다양한 비판이 제기될 수도 있겠지만, 사전 예방 원칙만 생각하고 움츠러들기만 한다면 지식은 성장을 멈출 뿐이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책에는 과학철학자이자 사회철학자인 칼 포퍼와 '밈'이란 개념을 만든 동물행동학자인 리처드 도킨스가 수없이 등장한다. 포퍼와 도킨스 두 사람이 저자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짐작하게 한다.

초생명체 지구라는 '가이아(Gaia)'이론과 인류가 지구환경을 지배한다는 '인류세' 개념은 물론 50년 전 로마클럽이 발표한 '성장의 한계' 보고서가 가진 한계까지도 짚어볼 정도로 책에는 1970년대 이후 과학 분야에서 축적한 폭넓은 지식이 가득하다. 책을 펼치면 과학의 향연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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