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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현상의 시시각각

대통령이 뜯는 두 번째 봉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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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어려울 때 하나씩 열어 보라며 전임자가 후임자에게 편지 세 통을 건넸다…." 이 오래된 유머의 처음과 끝은 항상 같다. 첫 번째 편지는 "전임자를 탓하라", 세 번째는 "편지 세 통을 준비하라"다. 버전이 갈리는 것은 두 번째 편지다. "언론을 장악하라"는 스탈린이 흐루쇼프에게 남겼다는 조언이다(물론 조크). 대개는 "부하 탓으로 돌려라" 아니면 "조직을 바꿔라"다. 경제가 어려울 때는 "구조조정을 해라"는 CEO용 버전이 돌아다녔다.

윤석열 대통령이 문재인 전 대통령으로부터 편지 세 통을 받았을 리 없겠지만, 첫 번째 가상의 편지는 이미 뜯었다. 그런데 효과가 영 신통찮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전 정부로부터 고물가·고금리·고환율 등 아주 나쁜 성적표를 물려받았다"고 푸념했지만 여론은 싸늘하다. 윤 대통령은 인사 비판에 대해 "전 정권 장관 중 이렇게 훌륭한 사람을 봤느냐"고 했지만 '훌륭한 장관'의 사고로 머쓱해졌다.

"전임자 탓" 첫 번째 편지는 역풍만
"조직 일신" 두 번재 편지 수용할까
세 번째 편지까지 아직 시간은 있다

남 탓을 하더라도 기술이 필요하다. 윤석열 정부가 첫 번째 편지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은 거칠고 직설적인 언어 탓이 크다. 문 전 대통령은 취임 이듬해에 취업자 수 증가 폭이 뚝 떨어지자 "오랜 신자유주의 정책이 경제적 불평등을 확대해 성장 동력을 떨어뜨렸다"고 변명했다. 보수 정부에 책임을 돌렸지만, 타깃은 정책 방향성에 맞췄다. "낮은 지지율의 원인은 야당의 프레임 싸움 탓"이라는 지금 대통령실 참모의 노골적 화법보다는 훨씬 고차원적 기술이다.

휴가를 끝낸 윤 대통령이 서둘러 두 번째 편지를 여는 듯하다. 문제 있는 장관을 내보내고 쓴소리를 하겠다는 젊은 당 대변인을 용산으로 불렀다. "초심을 지키겠다"며 몸을 낮춘 것은 다행이다. 그러나 뭔가 어색하다. 박순애(전 교육부 장관)는 나갔지만 윤핵관은 그대로다. 여당 내홍의 시초는 대통령과 원내대표 간의 '내부 총질' 문자였는데, 결과적으로 이준석 대표만 '자연스럽게' 내쫓은 꼴이 됐다. 이런 걸 두고 위기를 기회로 살렸다는 건가. 닫혀 가는 당은 민심과 점점 멀어지고 있다. 당내 강경 세력이 끔찍이 싫어하는 유승민·이준석이 차기 당 대표 적합도 여론조사(한길리서치)에서 1, 2위를 차지했다. 이를 또 민주당 지지자의 역선택으로 치부하고 말 건가.

대통령실이 9일 공식 페이스북 계정에 올린 카드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8일 일가족 3명이 사망한 서울 관악구 신림동 사고 현장을 방문한 사진을 배경으로 했다.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일자 대통령실은 현재는 삭제한 상태다. [대통령실 페이스북]

대통령실이 9일 공식 페이스북 계정에 올린 카드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8일 일가족 3명이 사망한 서울 관악구 신림동 사고 현장을 방문한 사진을 배경으로 했다.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일자 대통령실은 현재는 삭제한 상태다. [대통령실 페이스북]

그래도 답은 두 번째 편지에 있다. 조직 일신이다. 대통령실의 감수성과 능력 부족 사례가 한둘이 아니었지만, 이번 물난리 대응에서도 난맥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비 오면 퇴근도 안 하냐"는 대통령실 수석의 말은 국민 염장을 지른 실언이었다. 대통령이 우산을 쓴 채 쪼그리고 앉아 침수 현장을 들여다보는 국정 홍보 사진은 무감각의 절정을 보여줬다. 대통령은 초라해 보였고, 메시지는 겉돌았다. 이슈 자체보다 이슈 대응에서 성패가 갈린다는 국정 위기관리의 ABC를 잊었다.

야간 호우 속 이동이 여의치 않은 대통령의 자택 재난 대응 지휘를 비난하는 야당의 태도는 자디잘다. 정치학자 박상훈 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은 "민주당의 언어나 관심을 보면 대통령이나 그 주변 사람들이 실수하기를 바라는 마음, 인간의 나약함이 드러나 있다"고 했다(한겨레 인터뷰). 공감한다. 그러나 야당 공세를 국정 책임자가 정면에서 받아치는 것은 헛똑똑이나 할 짓이다. 민심의 포탄이 쏟아지는 고지에서는 일단 웅크려야 한다. 잘잘못은 상황이 정리된 뒤 따져도 늦지 않다.

유머는 현실을 뒤틀면서 반영한다. 남 탓을 하며 위기를 모면하라는 편지 세 통의 유머엔 마키아벨리적 냉혹함이 담겼다. 지금은 마키아벨리에게서라도 배울 때다. "같이 일한 지 석 달밖에…" 같은 온정주의를 허락할 틈조차 없는 위기다. 물론 윤 대통령이 뜯는 두 번째 편지에 이런 말이 쓰여 있으면 더할 나위 없다. 'Mea Culpa(내 탓이오)' 혹은 반구저기(反求諸己·자신에게서 잘못을 찾음). 그래도 위안이라면 세 번째 편지를 뜯기까지엔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