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에버라드 칼럼

펠로시의 대만행이 바꿔놓을 북한

중앙일보

입력 2022.08.12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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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진영 대결 속 중국 의존 더 커져

중국, 북한 핵실험 부추길 수도    

미국과 역내 동맹국 뒤흔들 카드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북한의 운명은 미국 정치인들의, 한국과는 전혀 무관한 결정·행동으로 정해질 때가 있다. 1988년 르윈스키 스캔들이 아니었다면 빌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을 방문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북한은 이후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다. 2002년 1월 29일 연두교서를 준비하던 조지 부시 대통령은 ‘악의 축’ 리스트에 이슬람 국가만 있다는 걸 우려한 끝에 북한을 넣었다. 북한이 아닌 다른 나라를 택했다면 북·미 관계는 지금과 다를지도 모른다.
 비슷한 일이 또 생겼다. 낸시 펠로시 미 하원 의장의 대만행이다. 그의 행동은 북한의(북한만 해당하는 건 아니지만) 세상을 바꿔 놓았다. 백악관이 배후에 있다고(사실은 아니지만) 확신한 중국은 대만 해상에서 군사 훈련과 미사일 발사로 대응했다. 다양한 분야의 대미 협력도 깼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중간 선거를 코앞에 둔 미국 정치인들은 펠로시 의장이 한 주 내내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걸 봤다. 이들은 거칠었지만, 미국이나 대만에 심각한 영향을 주지 못한 중국의 대응을 보며 펠로시의 뒤를 따를 것이고, 중국은 더 강력한 군사 조치로 대응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이 북한엔 어떤 영향을 줄까. 현재 대미 관계 개선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북한이 마음을 바꿔 미국의 대화 제안을 받아들인다 해도 이젠 중국이 화를 낼 것이다. 북한을 고집 센 동생쯤으로 여긴 중국은 이따금 북한 정권이 중국의 뜻을 거스르면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고 미·북 간의 어떠한 소통도 주시했다. 미국과 주요 협력 고리를 끊어버린 중국이 자신의 유일한 동맹국 북한이 미국과의 새로운 관계 모색을 허용할 리 만무하다.
 또 하나는 북한의 핵실험에 미칠 영향이다. 중국은 대만을 ‘핵심 이익’(한반도가 아니다)으로 천명했다. 증폭된 대만 위기 속, 제20차 당대회를 앞둔 중국은 상황을 통제하려 할 것인데, 북한의 핵실험도 이 범위 안에 든다. 하지만 북한이 핵실험을 하길 적극적으로 바랄 수도 있다. 앞으로 더 많은 미국 정치인이 대만을 찾을 경우 중국은 더 강경하게 나서겠지만, 군사 훈련이나 미사일 발사, 무역 보이콧 같은 대응은 반복할수록 효과가 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중국은 후폭풍을 감당하기 어려워 매우 주저하긴 하겠지만, 실질적 전쟁을 촉발할 대응(대만 함정에 대한 실탄 사격이나 미사일 공격 등)을 하든가,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접근법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북한이 핵실험을 하게끔 하는 상황은 중국 입장에선 매력적이다. 중국이 부추겨 핵실험을 했다는 걸 입증하기는 어려우니 중국은 부인만 하면 된다. 사실 북한의 핵실험은 중국의 그 어떤 독자적 행동보다 더 큰 파장이 있고 미국과 역내 동맹국들을 흔들 좋은 패다. 이제 북한 핵실험은 북한 당국보다 베이징의 결정에 달렸다고 보는 게 설득력이 있다. 슬픈 현실이다. 오랜 세월 북한 자긍심의 원천이던 핵무기 프로그램이 미·중 강대국 간 갈등의 부속물로 전락했다는 뜻에서다. 북한의 실질적 주권의 심각한 훼손을 의미하기도 한다.

중국의 강력한 반발 속에 지난 2일 대만을 방문한 낸시 펠로시(왼쪽) 미국 하원의장이 하루 뒤 차이잉원 총통을 만나 취재진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AFP=연합뉴스]

중국의 강력한 반발 속에 지난 2일 대만을 방문한 낸시 펠로시(왼쪽) 미국 하원의장이 하루 뒤 차이잉원 총통을 만나 취재진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AFP=연합뉴스]

 북한 입장에서 호재도 있다. 대만 위기 이전부터 국제질서는 워싱턴과 베이징 두 진영의 조폭 싸움으로 치달았다. 진영 간 대결은 더 심화할 것이다. 물론 북한은 중국 편이다. 중국은 ‘우리 편’ 북한을 방어하고 돌봐줄 것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중국이 자국 이익만 확보한다면 북한을 버릴 준비, 남북한 통일을 포함한 협정에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주장에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대만 위기로 그러한 주장은 설 자리를 잃었다.
 북한은 중국의 심기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중국의 지원과 지지를 확실히 보장받게 됐다. 북한의 안정이 더없이 중요해진 중국은 북한의 현상유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다. 북한이 아무리 심각한 도발을 해도 새로운 대북 제재안에 동의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러면 북한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바라볼까. 중국의 지속적 지원을 확보했다는 것에 안도하면서도 동시에 화도 날 것이다. 필자가 알고 지내던 북한의 당국자들은 거들먹거리고 오만한 중국인에게 깊은 반감을 갖고 있었다. 대부분의 북한 관료들은 중국 의존도를 줄이고, 더 많은 국제적 자유와 더 넓은 대외관계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당분간은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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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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