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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B급 주제서 A급 향기가…할리우드 놀랜 K콘텐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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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 노가영의 요즘 콘텐트 썰(2)


하위장르에서 A급 향기가

2021년 7월,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한국의 지위를 선진국으로 변경했다. 미국과 영국, 독일 등과 같은 그룹에 들어가기까지 참 오래 걸렸구나 싶지만,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지위가 변경된 것은 한국이 최초라고 하니 국뽕이 올라온다. 그런데 선진국은 무엇인가. 국민소득 3만 달러 같은 건 잠시 덮어두자. 서울대 이정동 교수는 신작 『최초의 질문』에서 한국은 선진국의 로드맵을 더 빨리 달성하는데 탁월한 역량이 있으나, 이제는 우리가 그 질문을 제시해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즉, 스스로 정의를 내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같은 거창한 감투 없이 우아하게 국격을 올린 것은 다름 아닌 K콘텐츠다. 모방도 스스로의 정의도 넘어선,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라는 품격을 갖게 했다. 물론 지금의 K콘텐츠 르네상스는 미국의 IT 유통망에 기대어 있음이 사실이다. 짐작 가능한 데로 유튜브와 넷플릭스다. 돌이켜보자면 한류마저도 동남아 사업자들과의 개별 계약구조를 통한 지엽적인 성공이지 않았는가. 그런데 ‘킹덤’을 시작으로 ‘스위트홈’, ‘오징어게임’, ‘지옥‘, ‘지금 우리 학교는’까지 미묘함이 보인다. 바로 공포, 좀비, 스릴러, 마샬 액션이라는 유사성이다. 미국 영화계는 이를 B급 장르라고 부르는데 저예산으로 제작한 자극적인 정서로 주로 공포영화에서 나타난다.

킹덤 포스터. [사진 넷플릭스]

킹덤 포스터. [사진 넷플릭스]

왜일까. 넷플릭스는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겠지만 그들이 동양의 작은 나라에 요구한 건 ‘미국의 하위 장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120조원에 달하는 할리우드 산업을 끌어가는 드라마, 로맨스, 가족, 코미디, SF 장르를 기대하진 않은 셈이니 이는 백여 년에 달하는 역사를 갖는 할리우드의 우월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오징어게임 포스터. [사진 넷플릭스]

오징어게임 포스터. [사진 넷플릭스]

그런데 스멀스멀 이상한 조짐이 보인다. B급 장르를 싼 가격에 완성도 높게 생산해오던 K콘텐츠에서 A급 장르의 향기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오징어게임’과 ‘지옥’에서 세상의 모순을 읽었고 인생을 봤고 급기야 ‘오징어게임’을 미국 방송계 최고 권위인 에미상의 14개 부문에 후보로 올렸다. 할리우드와 실리콘밸리가 ‘오징어 게임’으로 놀란 건 그간  ‘스위트홈’,  ‘킹덤’ 같은 K 드라마가 아시아 무대에서 1위를 찍은 적은 꽤 있었지만 OTT 종주국인 미국에서 1등을, 그것도 역대 넷플릭스 오리지널 역사상 최장 기간 1위를 이어간 탓이다.

‘오징어게임’이 선보인 한국의 ‘오리지널리티’

물론 K콘텐츠의 위력은 K팝과 K무비에서 익히 세계적으로 검증된 바 있다. 2020년 ‘기생충’과 BTS의 ‘다이너마이트’는 아카데미 시상식과 빌보드 차트를 휩쓸며 슈퍼 바이럴을 만들었다. ‘기생충’을 한번 들여다보자. 사실 하위계층이 상류계층을 골탕 먹이는 풍자는 우리에겐 신선했지만, 서양에서는 200년 이상 내려온 꽤 익숙하고 오래된 내용이다. 오페라와 오페레타(오페라보다 대중적이고 가벼운 음악극)에서 단골로 쓰이던 소재인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모차르트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피가로의 결혼’이 그러하다. 그런데 서양의 그것은 귀족층과 부르주아가 봐도 불쾌하지 않고 하층민에겐 유쾌한, 즉 두 계급을 분리하지만 궁극적으론 계급 통합적인 코미디로 향한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개봉 당시 극장 풍경. [뉴스1]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개봉 당시 극장 풍경. [뉴스1]

봉준호 감독은 이를 산뜻하게 틀어버린다. 수백 년간 이어온 사랑의 합창 코미디를 자본주의 세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계급은 절대 통합되지 않는다, 통합될 수 없다’로 맺는다. 이것이 바로 ‘오징어게임’과 ‘기생충’에서 보여준 한국의 ‘오리지널리티’다. 할리우드가 암묵적으로 지정한 하위 장르를 가성비 좋게 잘 카피해 온 모범생이 전 세계에 ‘오리지널리티’를 증명해낸 것이다.

이는 1990년대 현대그룹의 오리지널리티와 오버랩된다. 글로벌 기업순위 1000위 한참 밖의 현대 그룹이 타임스의 ‘세계를 움직이는 100대 파워’로 선정된 바 있는데, 이에 대한 타임스의 이유가 곱씹어 볼 만하다. 당시는 일본이 제조에 손만 대면 미국과 유럽의 선진 기업들이 나가떨어지고, 일본 브랜드가 가성비와 성능으로 시장을 초토화하던 시절이다. 오토바이 산업 역시 후발주자인 혼다, 야마하, 스즈키가 글로벌 시장을 집어삼켰다. 그런데 현대라는 요상한 기업이 치고 올라온다. 일본을 쫓아 모방하는데, 건설·조선·자동차까지 하나둘 그들을 따라잡으며 넘어서고 있다는 거다.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제목에 빗대어보자면 ‘The Strange Hyundai’쯤 되려나.

콘텐츠 산업 역시 마찬가지다. 미국의 IT 공룡들이 ‘가성비 좋게 잘 만들어서 OTT에 제공하라’는 것을 K콘텐츠는 하위 장르의 탈을 쓴 A급으로 만들어 놓은 거다. 마치 1990년대 현대가 상품을 재창조하는 리엔지니어링에 영리하게 성공한 것처럼 말이다. 압도적 콘텐츠 강국인 미국이 이제 자의 반 타의 반 한국의 오리지널리티를 인정하고 있다. 정통 드라마인 ‘인간수업’과 SF ‘고요의 바다’에 투자하더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같은 휴먼 드라마의 해외 판권을 독점으로 구매했다. 특히 ‘우영우’의 경우 법정 드라마라는 외피를 입었지만, 정통 중의 정통 휴먼 드라마가 아닌가.

이제 한국이 궁금하다

그런데 최근 미국을 중심으로 흥미로운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미나리’와 ‘파친코’, 그리고 디즈니 계열의 OTT인 훌루(HULU)가 제작을 발표한 ‘아메리칸 서울’은 한국과 한국인의 그리고 한국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한국인 가정의 미국 정착기인 ‘미나리’, 4대에 걸친 재일한국인 가족사 ‘파친코’, 한인 입양인이 서울에서 일하던 중 자신이 왕조 혈통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아메리칸 서울’, K팝 드라마인 ‘서울걸스’까지 모두 ‘한국과 한국인’이라는 콘텐츠에 집중한다. 이들 관계자는 그간 미국에서 한국어로 된 이야기는 외면당해 왔으나 이제 할리우드가 한국어 60% 이상의 콘텐츠를 들여다보고 있다고 전했다. 심지어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이 한국에서 벌어지는 문화현상을 내부에 보고하는 한국에 특화된 컨설턴트를 채용하고 있다니 말 그대로 기묘하다.

드라마 '파친코' 포스터. [사진 애플TV+]

드라마 '파친코' 포스터. [사진 애플TV+]

이는 마치 1964년 동경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고, 전설의 구로사와 감독을 시작으로 1970~1980년대 ‘감각의 제국’, ‘나라야마 부시코’가 칸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 비롯된 J 컬쳐 쇼크를 생각케 한다. 잘 들여다보면, 일본의 국격과 국가 브랜드가 올라가면서 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이라는 이미지가 희석되어간 시점도 이즈음이다. 이후 ‘사무라이’, ‘닌자’, ‘고질라’ 같은 일본의 60년대 문화들이 할리우드로 건너가 콘텐츠가 되었다. 일본이라는 브랜드의 본질이 할리우드의 상품이 된 것이다. 문화가 먼저 보이고 이후 문화의 주인이 궁금해지는 ‘저들의 본질은 뭐지?’라는 탐구이다. 레스토랑에서 고급진 음식을 먹고, 다음날 또 가며 단골이 되면 ‘Who is the Chef?’라는 질문이 나온다. 그가 어떤 과거에서 살았고 어디서 음식을 배웠는지가 궁금한 거다.

지금 딱 한국이 그런 상황이다. K컬쳐의 글로벌 현상이 실수와 우연이 아님이 수년째 검증되면서 이제 시장은 ‘한국과 한국인 그리고 한국의 ‘Something’까지 모조리 콘텐트로 받아들이고 있다. 즉, 생산자 군단이 콘텐트 그 자체가 된 모양새다. 워너브러더스 인터내셔널 TV 부사장은 ‘예전엔 ‘굿닥터’처럼 한국 드라마를 미국에 맞게 각색했다면, 요즘엔 '진짜 한국의 이야기'를 찾고 있다’고 말한다. 결국, 삼성과 현대가 못한 무언가를 K 컬쳐는 해낸 셈이다. 국격을 올리며 한국이라는 본질에 대한 호기심과 리스펙트를 동시에 가져왔다. 바야흐로 전 세계에 고통을 준 팬데믹이 아이러니하게 한국을 세상 힙(Hip)한 콘텐츠로 만들어 놓았다.

2022년 7월 넷플릭스가 K예능 상견례 행사에서 강하게 언급한 스피치로 마무리한다.

‘한국을 논하지 않고는 글로벌 엔터테인먼트를 말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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