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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윈 이전에 그가 있었다', 23년 만에 문 닫는 中 전자상거래 기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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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진정한 천재다. 내 성공은 거인의 어깨를 딛고 일어선 것뿐이다. 만약 그가 개인적인 일 때문에 사업을 매각하지 않았다면, 중국 전자상거래 비즈니스가 이미 그의 손아귀에 들어갔을 것이다.
-알리바바 창업주 마윈(馬雲)

스물여섯에 전자상거래 웹사이트를 설립하고, 스물아홉에 '중국 전자상거래의 아버지'가 됐으며 서른에 은퇴한 전설적인 인물이 있다. 바로 사오이보(邵亦波)다. 중국 전자상거래 업계에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 마윈은 서른다섯에 알리바바를 창업해 쉰 다섯에 은퇴했고, 징둥닷컴(JD.com)의 류창둥(劉强東)은 서른에 사업을 일으켜 마흔여덟에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뜻을 세우고 기반을 닦는 이립(而立)에 이미 혁신과 실행, 성공을 이룬 사오이보의 행보가 더욱 부각되는 이유다.

8월 13일 0시를 기점으로 중국의 전자상거래 기업 이베이이취(易趣)가 문을 닫는다. 무려 23년간 운영된 중국 최장수 전자상거래 업체다. 비록 전성기 이후에는 존재감이 없다시피 했지만 명맥은 이어오고 있었다.

이취(易趣)는 1999년 26세의 천재 사오이보와 27세 탄하이인(譚海音) 두 창업자에 의해 탄생했다. 2003년, 이취가 업계 점유율 80%를 차지하며 최전성기를 누릴 때, 사오이보는 이취를 이베이에 2억 2000만 달러에 매각했다. 이때가 그의 나이 고작 서른이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타오바오, 징둥의 등장으로 이취는 급격한 쇠퇴를 맞는다.

신중국 이후 최초의 하버드 전액 장학생


1973년, 상하이에서 태어난 사오이보는 중학교 수학 교사였던 아버지 덕에 일찍이 수학과 연산에 특출난 재능을 보였다. 그는 이미 초등학교 5학년에 상하이에서 열린 제1회 삼산(三算: 암산, 필산, 주산) 대회에서 1등을 하고, 명문으로 통하는 화동사범대 제2부속중학교에 입학했다. 사오이보는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수학 대회인 화뤄겅 골든컵(华罗庚金杯) 수학 국제 대회(일명 화베이싸이, 华杯赛)에 학교 대표로 출전했으며, 중국 전역에서 열리는 수학경시대회에서 수차례 1등을 거머쥐며 천재라 불렸다.

1991년, 사오이보는 세계에서 수학 부문 상위 5%의 학생들이 출전하는 미국초청수학경시대회(AIME)에서 두 번 연속 만점자로 특별상을 수상하며, 그해, 신중국 설립 이후 하버드 학부 전액 장학금을 받는 최초의 중국인이 됐다. 1995년 그는 물리학과 전자공학 학위를 취득하며 하버드대를 졸업했고 미국의 유명 물리학 연구소 8곳으로부터 입사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사오이보는 연구직 대신, 당시 미국 비즈니스 업계에서 가장 인기 있던 보스톤컨설팅그룹(BCG)에 입사를 결정했다.

그에게 내재된 비즈니스 감각과 사업 추진력이 그를 연구실 대신 컨설팅 회사로 이끈 것. 사오이보는 보스톤컨설팅그룹에서 근무한 2년 동안 고위 의사 결정권자와 함께 대기업의 많은 인수합병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최우수 직원'으로 선정됐다. 그는 회사가 지원한 9만 달러(약 1억 1700만 원)로 하버드 경영대학원(MBA)에 입학했다. 그는 이 시기, 인생의 반려자인 바오자신(鲍佳欣)을 만난다.

바오자신도 사오이보 못지않은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1995년 경영대학원 입학 평가 시험(GMAT)에서 780점을 받으며 세계 기록을 경신했으며, 당시 대만에서 가장 높은 TOEFL 점수(660점)을 보유한 수재였다. 그는 국립대만대학 약학과를 졸업한 후 하버드 케네디 스쿨에 입학했다. 바오자신은 대학원 재학 중에 'Little English Witch in USA'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곤 했는데, 두 사람은 사인회에서 처음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바오자신은 학위를 딴 후 대만으로 다시 돌아갔다.

중국의 변화 감지하고, 전자상거래 사업 결심
미국 떠나 상하이 작은 사무실에서 '이취' 만들어

1999년 하버드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딴 사오이보는 보스톤컨설팅그룹으로 다시 돌아가 연봉 15만 달러를 받으며 근무할 것이냐, 회사를 나와 지원금 9만 달러를 갚고 다른 사업을 하느냐를 두고 고민하다 퇴사를 결정한다.

TV나 매체, 그리고 부모님과의 통화로 중국 비즈니스 분야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으로 돌아가기 전 이미 중국에서 전자상거래 사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미국에서 설립한 지 3년 된 이베이는 경매 사이트에서 전자상거래 플랫폼으로 몸집을 키워나가는 중이었고, 사오이보는 한때 싱가포르 정부의 전자상거래 시장 계획하고 시장 기회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준 경험이 있었기에 시장의 변화를 더 빠르게 감지할 수 있었다.

사오이보와 탄하이인. 왼쪽에서 두 번째가 사오이보다.

사오이보와 탄하이인. 왼쪽에서 두 번째가 사오이보다.

1999년 여름, 사오이보는 하버드에서 함께 수학한 탄하이인에게 연락해 함께 중국에서 전자상거래 사업을 일으켜보자고 제안한다. 탄하이인은 맥킨지 컨설팅 회사에서 3년 동안 근무한 뒤, 하버드 경영대학원에 입학해 사오이보와 함께 수학했다. 탄하이인 역시 컨설팅 회사를 다니며 시장의 흐름과 변화를 인지하고 있었기에 미국에서 잘 다니던 직장을 나와 사오이보와 함께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사오이보는 상하이에 있는 개인 주택을 사무실로 임대한 다음, 시간제 엔지니어를 몇 명 고용해 플랫폼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약 두 달간 밤낮없이 매달린 끝에 이취의 경매 플랫폼이 구축됐고, 시장에 처음 출시됐다.

이취의 첫 번째 사무실

이취의 첫 번째 사무실

1999년은 중국 전자 상거래 발전의 역사에 있어 이정표가 된 해였다. 마윈은 알리바바를 세웠고, 왕쥔타오(王峻涛)는 같은해 5월, B2C 전자상거래 웹사이트인 8848.com을, 그해 8월 사오이보는 C2C 전자상거래 웹사이트인 이취를 설립했다.

통계에 따르면 1999년 말까지 중국에서는 370개 이상의 전자상거래 플랫폼이 탄생했다. 그러나 2000년 인터넷 거품이 도래하면서 수많은 기업들이 잇따라 문을 닫게 됐고, 전자상거래 산업은 이내 빙하기를 맞았다. 그러나 이취는 설립 4개월 만에 이베이와 유사한 특성을 지닌 미국 기업 3곳으로부터 650만 달러(약 84억 9000만 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2000년에는 루이비통Louis Vuitton으로부터 2050만 달러(약 267억 원)의 투자를 받으며 적으로 받는데 성공했다.

인터넷이 아직 대중화되지 않고, 전자상거래가 어려운 시기에 접어든 시점에 자본의 지원은 이취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자본을 토대로, 이취는 단번에 중국 전자상거래 시장 점유율 80%를 차지했다.

사오이보

사오이보

사오이보는 그 무렵 장거리 연애를 끝내고 바오자신과 결혼해 상하이에 정착했다. 이때, 사오이보의 인생에 또 한 번 큰 기회가 찾아온다.

우후죽순 생긴 전자상거래 업체 사이에서 단연 두각
미국 이베이에서 인수 제안

2001년 당시 이베이(eBay)의 CEO였던 맥 휘트먼(Meg Whitman)은 비행기 문제로 상하이로 우회하다가 고층 빌딩이 늘어서 있는 모습에 충격을 받고 중국 시장이 시급히 채굴해야 할 금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맥 휘트먼은 하버드 경영대학원 졸업생이었던 사오이보에게 연락해, 중국판 이베이인 이취에 3000만 달러를 투자해 지분의 33%를 인수했으며, 2003년 2억 2500만 달러에 이취를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사오이보는 그 당시, 중국 인터넷 거품과 무분별한 팽창과 혼란을 목격하고 전자상거래 사업을 매각하기로 결정한다. 당초 이베이는 사오이보가 4년 동안 대표직을 맡는 것으로 합의했으나 그는 대표직을 맡은 지 3개월 만에 사임을 결정한다. 바오자신의 부친이 별세했고, 슬픔을 이기지 못한 아내가 미국으로 떠나버린 것. 사오이보는 그런 아내를 따라, 자신의 직책을 내려놓고 가족과 함께 실리콘밸리로 떠났다.

그러나, 이취는 이베이에 인수된 뒤, 진보가 아닌 퇴보하기 시작한다. 이취를 인수한 맥 휘트먼은 중국 시장의 전망은 보았지만, 중국과 미국 시장의 발전 격차와 인식에 대해서는 인지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중국 현지화에 실패한 것이다.

알리바바의 '타오바오' 등장에
맥없이 무너진 이베이이취

당시 손정의로부터 투자를 받았던 마윈은 2003년 4월, 알리바바의 C2C 전자상거래 플랫폼 타오바오를 출범했다. 당시 이베이이취를 비롯한 대부분의 전자상거래 플랫폼은 판매자에게 다양한 수수료를 부과했으나, 타오바오는 무료 점포 개설로 많은 가맹점을 유치해나가며 시장 규모를 빠르게 확장해나가기 시작했다.

2004년 알리바바는 통신 효율성을 크게 향상시킨 메신저 서비스 왕왕(旺旺)의 출시와 결제 효율성을 크게 향상시킨 알리페이(Alipay, 支付宝) 서비스를 출시하며 업계를 빠르게 점령해갔다. 특히 거래 당사자 간의 신뢰가 부족했던 당시 중국 전자상거래 시장에서 알리페이는 ‘에스크로’ 서비스를 실시, 이용자들의 안심 거래를 도우며 업계의 절대 강자가 됐다.

중국 인터넷정보센터(CNNIC)에서 발표한 데이터에 따르면 2006년 이베이이취의 시장 점유율은 29%로 떨어졌고 타오바오의 시장 점유율은 70%에 육박했다. 2012년에는 격차가 더 벌어졌다. 타오바오의 시장 점유율은 95%까지 높아졌지만 이베이이취의 점유율은 0.01%로 떨어졌다. 그 이후 2022년 시장에서 이베이이취가 공식적으로 철수한다고 발표할 때까지 시장에서 이베이이취가 주목받거나 소비자의 선택을 받은 일은 거의 없었다.

사오이보는 이후 어떻게 살았을까? 그는 프랑스와 홍콩 등에서 거주하며 산과 바다를 여행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가족과 함께 하는 삶에 만족하며 감사하다고 언론을 통해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사오이보는 이베이의 잘못된 운영으로 부진을 면치 못하는 이취를 회생시키기 위해 한때 복귀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베이는 그의 복귀를 거절했다. 샤오이보는 당시 이베이이취 패배의 가장 큰 원인이 당시 타오바오와의 경쟁에서 핵심이었던 '결제 서비스'를 개발하지 못했던 것이라 회고했다.

2006년 사오이보는 미국 매트릭스파트너스에 합류했다. 2008년에는 매트릭스파트너스 차이나(经纬中国) 설립에 참여해, 중국 시장에 뿌리를 둔 스타트업을 중심으로 중기 투자에 집중적으로 나섰다. 지난 10년 동안 사오이보는 중국의 대표 육아 커뮤니티 플랫폼인 바오바오수(宝宝树), 중국 구인구직 사이트 례핀왕(猎聘网, Liepin.com), 자오강왕(找钢网) 및 펀치러(分期乐)를 포함해 총 12개 기업에 투자했다. 그는 투자를 할 때 투자사에 상당히 깊이 참여하는 편으로, 바오바오수의 공동창립자이기도 하다.

이후 사오이보는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전파하면서 투자를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고, 2017년 10월 '인류의 고난에 대한 선전포고'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시하고 '자선 벤처 캐피털'이라는 새로운 방향을 발표했다.

2018년, 사오이보는 1억 달러의 자금으로 '자선 벤처 펀드'를 설립했다. 투자 프로젝트에는 세계 최대의 명상 앱(APP), 어린이 심리 발달 연구 등이 포함되며 모두 '인간의 마음의 개방과 성장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과 유관하다. 현재 사오이보는 이윤이 아닌 세상의 이로움을 최우선으로 삼는 것을 제1의 목표로 삼고 있다.

차이나랩 임서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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