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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 치떨린다" 반지하 62만명…현실판 '기생충' 참담한 현장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8~9일 폭우로 피해를 입었던 류모씨(72·서울 관악구)의 반지하 집 내부 모습. 어환희 기자

지난 8~9일 폭우로 피해를 입었던 류모씨(72·서울 관악구)의 반지하 집 내부 모습. 어환희 기자

“돈이 없어 반지하에 오래 살았지만 너무 두려운 순간이었어요.”(서울 관악구 기초수급자 류모씨)
“앞으로 반지하에는 절대 살지 않을 겁니다.”(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청년 박서진씨)

세계경제 10위권 국가의 부끄러운 반지하 자화상

지난 8, 9일 서울시에 쏟아진 폭우에 침수 피해를 입은 ‘반지하 주민’들은 치를 떨었다. 10일 취재진이 찾은 류씨(72)의 반지하 집은 전쟁터 같았다. 가전제품과 가구는 바깥에 나왔고 장판은 벗겨져 있었다. 벽에는 성인 허리까지 물이 찼던 자국이 선명했다. 류씨는 “8일 밤 30분도 안 돼 물이 찼고 ‘빨리 나와’라는 남편의 고함을 듣고 몸만 빠져나왔다”고 말했다. 서울 서초구의 반지하 주택(월세 35만원)에 살다 3년 전 월세(20만원)가 싼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그는 “기초수급비 50만원으로 어떻게 살지 막막하다”고 한숨을 지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직장인 박서진(28)씨는 2015년 대전에서 상경한 꿈 많은 청년이다. 고시원에 살다 싼 월세(보증금 1000만원, 월세 45만원)를 찾아 신대방동으로 왔다. 수입(월 220만원)에 비하면 적지 않은 부담이다. 작은 창으로 하루 두세 시간 햇볕이 들지만, 겨울에는 곰팡이가 많이 생긴다고 했다. 수시로 화장실 물이 역류하고 지난 8일 밤 발목까지 물이 차 졸업앨범과 상장이 다 젖었다. 박씨는 “곧 옥탑방으로 이사할 예정인데, 이렇게 침수돼 원망스럽다”고 말했다.

갑작스레 ‘물 폭탄’이 쏟아지면 반지하 거주자들이 가장 먼저, 가장 큰 피해를 본다. 이번에는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이모(72)씨 두 딸과 손녀(13)가, 서울 동작구에서 50대 기초수급자 여성이 숨졌다. 2017년 7월 폭우 때엔 인천의 반지하 주택에서 90대 치매 노인이 숨졌다. 2010년 태풍 곤파스 때 침수된 주택의 90%가 반지하였다. 류씨와 박씨의 이웃 반지하도 모두 물에 잠겼다.

통계청 인구총조사에 따르면 2020년 전국의 반지하(지하 포함) 주택은 32만7320가구이다. 서울에만 20만849가구(61.4%)가 몰려있다. 참사가 벌어진 관악구에 가장 많은 2만여 가구(10%)가 있다. 인천·경기를 더한 수도권이 전국의 95.9%를 차지한다. 평균 가구원이 1.9명(2015년 기준)인 점을 고려하면 대략 62만여명이 반지하에 산다. 2015년 36만3896가구에서 매년 줄고 있긴 하다.

지난 8~9일 폭우로 피해를 입었던 서울 관악구에 사는 류모(여·72) 씨의 반지하집 옆 주차 공간에는 비로 인해 망가진 물건들이 나와 있다. 어환희 기자

지난 8~9일 폭우로 피해를 입었던 서울 관악구에 사는 류모(여·72) 씨의 반지하집 옆 주차 공간에는 비로 인해 망가진 물건들이 나와 있다. 어환희 기자

국토연구원의 보고서 ‘영화 기생충이 소환한 지하 거주실태와 정책적 시사점’(2020년)에 따르면 반지하 주택이 수도권에 몰려 있는 이유는 높은 주거비 때문이다. 보고서 작성자인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장은 “반지하 주택이 가난한 가족의 최후 보루”라고 지적한다. 이 연구소의 서울 반지하 실태 조사에 따르면 서울 반지하 가구의 29.4%가 기초수급자이다. 소득 100만원 미만 가구가 23%이다. 연구소 측은 “반지하의 월세가 지상의 3분의 1이라서 저소득층이 거주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서울 반지하 주택의 72%는 채광 불량이다. 환기(59%), 방수(46%)도 마찬가지다. 참변이 발생한 서울 신림동 반지하 주택은 세로 30㎝ 크기의 창이 도로에 붙어있다. 영화 기생충처럼 취객의 노상방뇨를 참고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봉주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한국에는 최저주거기준에 미달하는 가구가 상대적으로 많다. 우리 경제 수준에 비춰볼 때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정부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227만명에게 임대료나 집수리비 등의 주거급여를 제공한다. 기초수급자가 아닌 저소득층이나 청년 1인 가구엔 그런 지원이 없다. 게다가 기초수급자에게도 재해 대비 지원책은 눈에 띄지 않는다. 이봉주 교수는 “반지하에 생계가 어려운 사람이 많이 산다. 주거복지라는 차원에서는 반지하든 어디든 일정 정도의 안전이 보장돼야 한다”며 “수해에 무방비로 노출될 확률이 높은 가구구조가 아닌지 살펴서 안전을 보장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2020년 영화 기생충으로 인해 반지하 주택 문제가 불거지자 전국 실태조사를 하겠다고 발표했다. 최은영 소장은 “이런 일이 발생할 때마다 정치권이나 정부, 언론이 반짝 관심을 보이다가 좀 지나면 아무도 챙기지 않는다”며 "윤석열 정부가 연간 10만 가구의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하겠다고 하는데, 의지만 있으면 32만 가구의 반지하 주택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 소장은 “상습적으로 침수되거나 하천을 끼고 있는 데부터 먼저 옮기고, 안전을 위협하는 반지하 주택의 임대를 금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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