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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언의 시시각각

박순애 사태가 드러낸 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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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어린이가 예전보다 일찍 성숙한다고 생각했다. 우상향 일변도의 신체 발달 통계가 꾸준히 발표됐다. 식당 등에서 본 서너 살 아이들은 태블릿PC나 스마트폰을 척척 다뤘다. TV에는 여러 방면에 재능을 보이는 신동들이 줄줄이 등장했다. 빨리 자라고 빨리 똑똑해진다고 믿었다.

'일찍 성숙' 근거 없고, 돌봄도 부실 #인구 감소에도 '경쟁 공포' 그대로 #실행력 있는 개혁가에 교육 맡겨야

판단이 잘못됐다는 것을 ‘박순애 사태’가 알려줬다. 신체 발달이 좋아진 것은 맞으나 언어·정서 등 인지적 면에서는 평균 발달 속도가 과거에 비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전문가들이 미디어에 말했다. 충격적 정보도 접했다. 언어 발달이 지체돼 전문기관에서 치료받는 5세 이하 어린이가 크게 늘었고(2017년 대비 2021년 약 30% 증가), 대학병원에서 언어 지연 진단검사를 받으려면 1년을 기다려야 한다(수요와 공급의 문제로)는 보도가 나왔다(중앙SUNDAY 8월 6일자 2면). 기사는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환경 영향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사임을 발표하는 박순애 전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연합뉴스]

사임을 발표하는 박순애 전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연합뉴스]

그렇다면 코로나 사태 전에는 어땠을까. 언어 지체는 일시적 현상이고 아이들 언어 능력은 꾸준히 늘어온 것이 아닐까. 이런 의문이 들어 코이언어발달연구소 이경숙 원장에게 물어봤다. 답을 요약하면 이렇다. “코로나 확산 전에도 유아기 어린이들의 언어 구사·이해력이 과거에 비해 좋아졌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전반적으로 교육 환경이 나아졌지만, 핵가족화되고 형제자매가 없거나 한 명 정도 있게 되면서 말을 듣고 따라 할 기회가 줄었다. 영상물 등의 시청각 자료가 미치는 영향에는 한계가 있다.”

과거 정부들이 돌봄·보육 시스템 확충을 입버릇처럼 말해와 제법 시스템이 갖춰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후 한두 시면 수업이 끝나는 초등 저학년 학생들이 집에 돌봐줄 사람이 없으면 저녁까지 학교나 지역 돌봄센터에 머물며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할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학교 돌봄 시스템 마련은 교사 또는 기존 기관 이해에 발목을 잡혀 제자리걸음인 지가 오래였다. 돌봄센터에 자리가 없거나 돌봄의 방식이나 시설이 미덥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아이를 ‘학원 뺑뺑이’ 대열에 넣었다는 부모의 원성이 이어졌다.

인구 절벽 현실이 ‘경쟁 공포’를 덜어주는 데는 도움이 되겠다 싶었다. 지난해에 태어난 아이는 26만 명이다. 2001년에 태어난 국민은 56만 명이다. 놀랍고 무섭게도 20년 새 54%가 줄었다. 인생의 경쟁 상대가 그만큼 감소하니 요즘 아이를 낳은 부모는 적어도 대입 걱정에서는 다소 해방돼 있으리라 여겼다. 역시 아니었다. 초등학교 입학 연령 하향 과정에서 같은 학년 학생이 25%(만 5세를 4년에 걸쳐 만 6세 학령에 흡수하는 게 박순애 전 교육부 장관 방안) 늘어나는 것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해당 부모가 많았다. 특목고 진학, 대입, 취업에서의 불이익을 말했다. ‘대학이든, 뭐든 좋은 자리는 어차피 얼마 안 된다. 학생 수가 준다고 해서 확 달라지지 않는다.’ 맘카페에서 본 글이다.

교육학자와 교육 관료가 정작 교육 정책 수립과 집행에 필수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이 사회에 널리 퍼진 믿음을 다시 돌아보는 기회도 됐다. 35일 교육부 장관 퇴진 사건의 부수적 효과다.

여기에 하나를 보태자면 개혁을 할 줄 아는 적임자가 필요하다는 인식이다. 지금 한국 교육은 1995년(김영삼 정부) 발표된 5·31 교육개혁의 틀 안에 있다. 27년간 유지된 구조다. 전 정부를 포함해 몇몇 정권이 ‘업데이트’를 약속했지만 공염불에 그쳤다. 대입 수시·정시 비율 오락가락이 주로 한 일이었다. 그사이 교육 경쟁력은 꾸준히 후퇴했다. 부모와 학생이 들이는 돈·시간·노력에 걸맞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학생이 교실에서 잠을 자고 학원에서 공부한다. 선진국 중에서 유일하다. 인구 감소와 4차 산업혁명 시대 대비책도 없다. 5·31 개혁을 주도한 박세일·안병영 같은 종합적 기획력과 실행력을 갖춘 개혁가를 위정자가 찾아낸다면 박 전 장관 낙마는 전화위복의 모범 사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