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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만 넣으면 30초만에 쓴다, ‘AI 문학’의 탄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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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인공지능(AI) 시극 ‘파포스’를 만든 김제민(아래) 연출과 AI 개발자 김근형 박사를 8일 서울 통의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세로로 세운 대형 TV 패널에 흐르는 글이 이번 시극에 수록된 시 20편을 쓴 AI 시인 '시아'의 시다. 김 연출은 “AI 시의 여백을 채우는 건 관객의 해석이 될 것"이라 했다. 우상조 기자

인공지능(AI) 시극 ‘파포스’를 만든 김제민(아래) 연출과 AI 개발자 김근형 박사를 8일 서울 통의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세로로 세운 대형 TV 패널에 흐르는 글이 이번 시극에 수록된 시 20편을 쓴 AI 시인 '시아'의 시다. 김 연출은 “AI 시의 여백을 채우는 건 관객의 해석이 될 것"이라 했다. 우상조 기자

“헷갈리네요.”

“시금치에서 공포를 느끼기 쉽지 않죠.”

“사람이 쓴 이야기에선 취향이 느껴졌습니다.”

지난 4일 밤 디지털 아트 전문기관 ‘아트센터 나비’(관장 노소영)가 화상 채팅 방식으로 주최한 ‘AI공포라디오쇼’에선 인공지능(AI)이 만든 괴담 맞추기 게임을 놓고 참가자들 사이에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괴담 7편 중 AI의 창작물은 3편. 참가자들이 다수결로 머리를 맞댄 결과, 정답은 모두 맞혔지만 “무척 헷갈렸다”는 의견이 채팅 창에 잇따랐다.

AI는 참가자들이 제시한 엉뚱한 소재를 갖고서 실시간으로 단편 공포물을 만들기도 했다. 여기에 운영진이 AI 프로그램으로 생성한 이미지, 기계 음성을 덧붙여 짧은 낭독처럼 만든 결과물을 다 같이 즐기며 관람평을 하기도 했다. 이날 행사는 ‘인간과 기계의 진정한 협력’을 취지로 한 독특한 쇼였다. 쇼 진행에 참여한 권보연 연구원은 AI와 함께 이야기를 빚어내는 것을 ‘AI 조각하기(AI Carving)’라 명명했다.

AI가 인간의 영역인 줄로만 알았던 창작 분야로까지 활동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AI가 작곡을 한 지는 오래다. 이제는 인간과 함께 시와 소설까지 만들어가면서 ‘AI 창작예술’의 가능성을 높여간다.

지난 4일 화상 채팅으로 진행된 ‘AI공포라디오 쇼’. 일반인 90여 명이 즉석에서 글감을 제시해 AI와 함께 괴담을 만들어냈다. [사진 오영진]

지난 4일 화상 채팅으로 진행된 ‘AI공포라디오 쇼’. 일반인 90여 명이 즉석에서 글감을 제시해 AI와 함께 괴담을 만들어냈다. [사진 오영진]

‘AI공포라디오쇼’의 기반이 된 프로그램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본사를 둔 AI 연구소 오픈AI의 초거대 언어 모델 GPT-3. 2020년 강력한 언어 처리 능력과 함께 탄생해 컴퓨터 언어가 아닌 일상어(영어)로도 지시할 수 있도록 업그레이드됐다. 지난해 11월엔 카카오 계열 AI 전문회사 카카오브레인이 한국어에 특화한 KoGPT를 출시해 한국어로 키워드를 넣으면 AI가 시와 소설을 만들 수 있게 됐다. ‘AI공포라디오쇼’를 기획한 오영진 한양대 한국언어문학과 겸임교수는 “창작과 해석, 작가와 독자만 있었던 문학에 AI 조각하기란 새로운 영역이 생겨났다”며 “AI가 두루뭉술하게 만든 텍스트 덩어리를 인간이 편집·선택하며 이야기를 만드는, 해석의 관점이 들어간 창작”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창작 과정에선 AI가 제시한 이야기를 재구조화하면서 완성도를 높여가는 인간의 리터칭 기술이 중요해진다”고 했다. AI와 인간의 공동 창작 과정을 다수 참가자가 실시간으로 즐길 수 있게 하는 참여형 관람 상품으로 확장될 가능성도 있다.

‘AI공포라디오쇼’는 올 하반기 여러 문화 행사에서 실시간 연극처럼 선보일 예정이다. 오 교수는 “GPT-3 모델의 두려운 점은 인간인 척 대답한다는 점”이라며 “AI의 영리한 사용법을 알리기 위해 TV 프로그램도 구상 중”이라고 밝혔다.

AI 창작 시도가 확대되면서 ‘AI 시인’의 시를 토대로 만든 시극 공연도 탄생했다. 오는 12~14일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초연하는 국내 최초 AI 시극 ‘파포스’다. 입소문이 나며 98석 규모 총 5회 공연이 매진됐다.

5명의 배우가 연기할 시 20편의 작가는 ‘시아(SIA·詩兒)’. 미디어아트 그룹 슬릿스코프의 공동 대표인 연출가 김제민 서울예대 교수와 AI 개발자 김근형 박사가 지난해 11월 KoGPT 출시에 맞춰 카카오브레인과 함께 선보인 AI 시인이다. 두 사람은 ‘AI를 도구가 아닌 예술적 주체로서 생각하고 인간에 대해 질문하는 계기를 만든다’는 데 뜻을 모아, 질문을 주고받는 AI(아이퀘스천), 춤추는 AI(마디), 공간을 생성하는 AI(루덴스토피아)에 이어 시 쓰는 AI를 세상에 내놨다. 김제민 교수는 “지난해 무료 공연한 쇼케이스 ‘시작하는 아이’를 보완한 것인데 반응이 이 정도일 줄 몰랐다”고 말했다.

시아의 시 53편을 담은 시집 『시를 쓰는 이유』(리멘워커)도 지난 8일 출간됐다. 시아가 인터넷 백과사전, 뉴스 등으로 한국어를 익힌 뒤 1980년대 이후 현대시 1만2000편을 읽고 작법을 배워 쓴 시들이다. 시상을 입력하면 30초 만에 시를 뽑아내지만, 이런 수준에 오기까지 시행착오도 많았다. 김근형 박사는 “시아에게 시를 학습시키기 전엔 설명문이나 수필 같은 글이 나왔는데, 시 학습을 많이 할수록 색다른 단어의 조합이 나오기 시작했다. 적당한 때에 학습을 멈추게 하는 게 사람의 역할”이라며 “‘양자우편’이란 시는 과학의 양자 통신 개념이 녹아있으면서도 감성적인 시여서 가장 재밌었다”고 말했다.

김제민 교수는 “문법적 오류의 경계에서 AI와 작업하면 흥미로운 시가 나올 것 같았다. 시아와 함께 작업하면서 ‘시란 무엇인가’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됐다”면서 “AI도 결국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 예술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는 형태로 발전할 것 같다”고 내다봤다.

AI를 활용한 창작 시도가 활발하지만, 인간의 개입이 결과물을 크게 좌우한다는 점에서 아직은 개발 단계에 불과하다는 시각도 있다. 문화평론가 강유정 강남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AI 서사 능력이 세련되고 좋아졌지만, 아직까진 학습된 내용에서 경우의 수를 고르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만든다”며 “게임이나 관습화된 대중물에선 적합할지 모르지만, 영화 ‘기생충’ 같은 서사의 의외성·우발성까지 가능할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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