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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물잠겼다" 새벽 車 안내한 도로위 영웅…고3 학생이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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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울어도 돼. 빨래 옮기고 바닥 닦는 거 도와주러 올게.”

신림동 선한이웃교회 유종녀(63) 전도사가 진흙과 오수로 엉망이 된 반지하 집에서 눈물을 훔치는 주민을 끌어안고 말했다. 8일 밤 일가족 3명이 목숨을 잃은 현장 인근이다. 지난 이틀간 기록적인 폭우로 침수 피해가 극심했던 신림동. 10일 오전 날씨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맑게 개었지만 현장엔 폭우가 할퀴고 간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날이 갰지만 정전으로 여전히 어둑한 반지하에서 주민들은 냉장고·장롱·옷가지 등을 도로 밖으로 끌어냈다. 길목 곳곳에는 폐기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팔뚝 굵기 양수기 호스에서는 여전히 흙물이 콸콸 쏟아졌다. 한쪽에서는 포크레인이 도로 위 지름 1.5m 가까이 되는 싱크홀을 메우는 중이었다.

첨벙거리는데 캄캄한 집…치우다 다치기도 

10일 오전 전날 지하수가 넘쳐 흘러 엉망이 된 서울 관악구 신림동 한 반지하 주택. 이수민 기자

10일 오전 전날 지하수가 넘쳐 흘러 엉망이 된 서울 관악구 신림동 한 반지하 주택. 이수민 기자

도무지 잠이 안 와 오전 4시부터 집에 와 정리를 시작했다는 신림동 주민 고모(76)씨. 아들과 함께 집 밖으로 꺼낸 가구를 늘어세운 줄이 20m 가까웠다. 바닥이 미끄러워 아찔한 순간이 생기기도 했다. 짐을 옮기다 넘어졌다는 고씨의 팔뚝엔 손바닥 만한 멍이 들어 있었다. 아픈 팔로 수백 번 물을 퍼낸 고씨는 “차단기마저 자꾸 내려가 앞도 잘 보이지 않는다”고 울먹였다.

고씨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의 신사동(옛 신림4동)의 상황도 비슷했다. 안방에 출렁이는 물을 보며 흐느끼던 김명옥(67)씨는 “혼자 사는데 몸이 성치 않아 치울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반지하 주택에 살던 한 가족은 집에 앉을 자리를 내지 못해 주차장에 돗자리를 펴 놓고 점심을 먹고 있었다. 이 집의 아들 신정태(21)씨는 “큰 집도 와서 도와주고 계시지만 치울 엄두가 안 난다”고 말했다.

서울 관악구 신사시장 일대. 한 가족이 침수된 집에 앉을 곳이 없어 주차장에 돗자리를 펴고 점심을 먹고 있다. 이수민 기자

서울 관악구 신사시장 일대. 한 가족이 침수된 집에 앉을 곳이 없어 주차장에 돗자리를 펴고 점심을 먹고 있다. 이수민 기자

먼저 나선 시민·교회·군대

서울 관악구 신사동 김명옥(67)씨의 집에서 못쓰게 된 가구를 옮기고 있는 수도방위사령부 군인. 이수민 기자

서울 관악구 신사동 김명옥(67)씨의 집에서 못쓰게 된 가구를 옮기고 있는 수도방위사령부 군인. 이수민 기자

망연자실한 주민들에게 제일 먼저 손을 내민 곳은 신림동의 한 작은 교회였다. 침수가 발생한 8일 밤 배수펌프를 실어 나르며 주민들에게 나눠줬고 9일부터 이날 오후까지는 복구 작업을 도우며 젖은 옷가지·이불 등을 빨래방으로 실어 날랐다. 군도 본격적인 대민지원에 나섰다. 남태령에 있는 수도방위사령부는 이날 120명의 장병을 현장에 투입해 오전 10시부터 오후 늦게까지 수해 복구를 도왔다. 골목 골목을 다니며 폐기물을 수거해 군용차량에 싣는 군인들의 이마엔 구슬땀이 맺혔다.

노란 조끼를 입은 관악자원봉사센터 관계자들 40여명도 집집마다 흩어져 짐을 나르고 진흙을 닦아냈다. 주민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생면부지인 사람들이 자기 일처럼 도와줘 용기를 얻는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신사시장 내 지하 사무실이 물에 잠겼다는 남은혁(34)씨는 “직원 둘이서 치우려면 일주일도 넘게 걸렸을 일을 이렇게 다 같이 도와주시니 그저 감사할 뿐”이라며 “멍한 상태였는데 앞으로 어떻게 할지 차차 생각해보겠다”고 말했다.

팔 걷은 이웃들

신림동 침수 피해 주택 바닥을 닦아내기 위해 끌대를 조립하고 있는 선한이웃교회 관계자. 이수민 기자

신림동 침수 피해 주택 바닥을 닦아내기 위해 끌대를 조립하고 있는 선한이웃교회 관계자. 이수민 기자

막막한 현실에서도 이웃은 서로의 버팀목이었다. 주민들은 서로 양수기를 빌려주거나 옷가지와 신발 등을 나누었다. 신림동 청년들도 힘을 모았다. 침수 당일인 8일 밤 도로에서 핸드폰 불빛으로 차량 우회를 유도하는 등 피해 예방에 나선 것이다. 당일 고등학교 3학년 남학생과 현장에 있었다는 유모(32)씨는 “학생이 밤 9시부터 새벽 3시까지 자발적으로 나와 도로를 지켰다”며 “다시 만나게 되면 커피라도 사주고 싶다”고 말했다.

복구 현장엔 먼 곳에서 찾아오는 발길도 늘고 있다. 경기도 과천에 산다는 강인석(33)씨는 침수로 인한 신림동 인명 피해를 뉴스로 접한 후 휴가를 포기하고 달려왔다. 그는 “여기 말고도 비슷한 피해를 당하신 분이 더 있다는 생각에 걱정이 된다”며 “늦게까지 할 수 있는 만큼 돕다 가겠다”고 말했다.

내일 또 비…구청 “도로 막는 토사물 치우는 중”

구청 등의 행정적 지원은 턱없이 모자란 상황이다. 주민들은 침수로 인해 금전적 피해도 크지만 ‘폐기물 무료 수거’ 외엔 별다른 지원 소식을 듣지 못했다고 한다. 노인들은 ‘군인 대민지원’ 신청 방법을 몰라 놓치기도 했다. 11일부터 수도권에 최대 350㎜ 비가 다시 내릴 수 있다는 기상청의 예보에 주민들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관악구청 관계자는 “구청 직원뿐 아니라 군인, 자원봉사센터 인력을 총동원해서 복구작업을 하고 있다”며 “내일 같은 침수 상황이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도로·빗물받이를 가로막는 토사물과 폐기물을 치우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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