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한중비전포럼

한중 ‘다음 30년’은 체제와 이념 차이 분명히 하는 ‘화이부동’ 시대 열어야

중앙일보

입력 2022.08.10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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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유상철 기자 중앙일보 중국연구소장
한중이 오는 24일로 수교 30주년을 맞는다. 사진은 1992년 8월 24일 이상옥 외무장관(앞줄 왼쪽)이 중국 베이징 댜오위타이 국빈관에서 첸치천 중국 외교부장과 ‘한중 외교관계 수립에 관한 공동성명서’를 교환한 뒤 악수를 나누는 모습. [중앙포토]

한중이 오는 24일로 수교 30주년을 맞는다. 사진은 1992년 8월 24일 이상옥 외무장관(앞줄 왼쪽)이 중국 베이징 댜오위타이 국빈관에서 첸치천 중국 외교부장과 ‘한중 외교관계 수립에 관한 공동성명서’를 교환한 뒤 악수를 나누는 모습. [중앙포토]

한국과 중국이 국교를 정상화한 지 30년이 흘렀다. 강산이 세 번 바뀔 세월인 만큼 한중 관계엔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때로는 협력을 다짐하고 때로는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한중관계는 지속적으로 발전해왔지만 최근 상황은 낙관만 할 수는 없을 정도로 도전의 요인이 많아졌다. 지난 30년을 어떻게 평가하고 다음 30년을 어떻게 열어갈 것인가. 한중비전포럼은 이하경 중앙일보 주필의 사회로 지난 7월 말 국내 최고 권위의 중국 전문가인 서진영 고려대 명예교수, 윤영관 서울대 명예교수(전 외교부 장관), 위성락 한반도평화만들기 사무총장(전 한반도평화교섭 본부장), 한중수교 30주년 기념사업준비위원회 상임위원장인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 원장을 초청해 좌담회를 가졌다. 다음은 좌담회 전문이다.

한중비전포럼이 개최한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 좌담회가 지난달 말 서울 중구 HSBC빌딩에서 열렸다. 왼쪽부터 위성락 전 한반도평화교섭 본부장, 윤영관 전 외교통상부 장관, 서진영 고려대 명예교수,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 원장, 이하경 중앙일보 주필. 김경록 기자

한중비전포럼이 개최한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 좌담회가 지난달 말 서울 중구 HSBC빌딩에서 열렸다. 왼쪽부터 위성락 전 한반도평화교섭 본부장, 윤영관 전 외교통상부 장관, 서진영 고려대 명예교수,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 원장, 이하경 중앙일보 주필. 김경록 기자

▶이하경=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말이 있듯이 1992년의 한중 수교도 국내외적인 흐름과 궤를 같이했기에 성사가 됐습니다. 국제적으론 탈냉전의 시대를 맞았고, 한중 양국 간에는 경제와 외교안보 측면 모두에서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측면이 있습니다. 한국은 중국과의 수교로 북방외교를 완성시켜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확보하고 미지의 거대 시장 중국을 개척하려 했습니다. 중국은 한국과의 경제 협력뿐 아니라 한국과 대만 사이를 떼어놓으려는 목표가 있었습니다. 지난 30년을 돌이켜볼 때 경제 분야에서는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외교안보 측면에서 보면 한반도 정세는 북핵 고도화로 인해 여전히 긴장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이에 따라 한중 수교가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서진영 고려대 명예교수는 “지난 30년 한중 관계의 키워드 중 하나였던 구동존이(求同存異)가 수명을 다했다”며 이제는 “중국과 체제와 이념의 차이를 분명히 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경록 기자

서진영 고려대 명예교수는 “지난 30년 한중 관계의 키워드 중 하나였던 구동존이(求同存異)가 수명을 다했다”며 이제는 “중국과 체제와 이념의 차이를 분명히 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경록 기자

▶서진영=한중 수교 30년을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 사태 전후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드 이전은 한중관계의 황금기로 경제는 물론 외교와 안보 측면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습니다. 수천 년 한중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밀월기로 그런 시대가 다시 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한마디로 한중관계의 봄날은 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드 이후 한중관계는 좋게 말하면 조정기, 나쁘게 말하면 시련기입니다. 외교안보와 군사는 물론 경제 분야에서도 한중은 만만치 않은 갈등에 직면해 있습니다. 왜 사드 사태가 한중관계를 양분하는 기준이 되는가. 이와 관련해 세 가지 측면을 봐야 합니다. 첫 번째는 전략 환경의 변화입니다. 과거 탈냉전과 세계화의 시대에서 이젠 미·중 패권경쟁이 노골화되는 ‘세력 전이(power shift)’의 시대로 전환하면서 한중 양국의 전략 환경에 구조적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두 번째는 국력의 변화입니다. 중국의 강대국화로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정책과 한국에 대한 정책이 변화하고 있고, 한국 역시 강대국 중국에 대한 정책이 변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민족주의 정서의 분출입니다. 한중 모두 국운 상승기를 맞아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정서가 확산하면서 양국 간 갈등과 마찰을 증폭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한중관계가 미래 30년에도 순항하기 위해선 이 세 가지 차원에서의 대응이 절실합니다.

윤영관 전 외교부 장관은 “한국은 중국에 주권평등과 상호존중, 호혜원칙을 기반으로 하는 평등한 관계가 돼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김경록 기자

윤영관 전 외교부 장관은 “한국은 중국에 주권평등과 상호존중, 호혜원칙을 기반으로 하는 평등한 관계가 돼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김경록 기자

▶윤영관=한중관계엔 명(明)과 암(暗)이 존재하는데 지금 상황은 수교 초기의 희망 섞인 기대, 즉 ‘명’의 부분이 차츰 약해지고 어두운 ‘암’의 측면이 점차 부각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중관계가 어떤 분기점에 도달한 느낌입니다. 지난 30년을 보면 한중관계에서 크게 세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경제적 상호의존은 커졌는데 정치적 협력이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일종의 불균형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중국의 국력이 급속하게 신장되며 한중 간 위상 차이가 계속 확대되어 온 결과 두 나라 간 국력의 비대칭성이 심화됐다는 점입니다. 세 번째는 2008년 이명박 대통령 시기 한중관계가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로 격상됐지만, 이 ‘전략적 협력’이란 게 실질적으론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북한문제가 바로 그렇습니다. 한국은 북한의 도발을 막고 비핵화 달성을 위해 중국이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해주길 기대하지만, 중국은 미·중대결구도를 의식해 북한을 전략적 완충지대로 보기에 북한을 감싸는 것과 같은 행보가 보입니다.

위성락 전 한반도평화교섭 본부장은 “중국이 한국을 쉽게 보지 않게 새로운 원칙과 방향을 가지고 새로운 한중 관계를 쌓아가야 한다”며 “그러면서도 우리 국민에겐 중국을 적대하면 안 된다는 걸 설득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경록 기자

위성락 전 한반도평화교섭 본부장은 “중국이 한국을 쉽게 보지 않게 새로운 원칙과 방향을 가지고 새로운 한중 관계를 쌓아가야 한다”며 “그러면서도 우리 국민에겐 중국을 적대하면 안 된다는 걸 설득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경록 기자

▶위성락=현재 한중관계는 시련기에 처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외형상 양적으로는 폭발적인 성장을 이뤘고 인적교류도 크게 증가했습니다. 그러나 질적으로 볼 때 많은 성과가 있었다거나 바람직했다고 평가하긴 어렵습니다. 이 같은 결과에 이르게 된 배경엔 지난 30년간 한중 양국의 접근 자체가 달랐다는 사실이 자리합니다. 무역이 언제나 한국에 흑자였고 교류자체가 우리에게 이득이었기에 우리는 한중관계에서 무엇을 겨냥해야 하는지에 대한 전략적 문제의식이 부족했습니다. 반면 중국은 주변의 역학관계를 자국에 유리하게 바꿔야 한다는 분명한 전략적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중국은 한국을 미국이라는 동맹으로부터 자기 쪽으로 견인하기 위해 꾸준하게 노력해 왔습니다. 그렇게 30년을 지나다 보니 어느새 중국은 ‘갑’이 되고 한국은 ‘을’이 되는 이상한 관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중국은 한국을 점점 더 손쉽게 생각하게 되었고, 한국에 대한 중국의 고압적 태도가 ‘뉴노멀(new normal)이 된 결과 마침내 사드 사태까지 터지게 됐다고 여겨집니다.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 원장은 “한중 청년 세대의 갈등 해소를 위해 한중을 넘어선 아시아를 키워드로 문화적 공감대를 넓혀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경록 기자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 원장은 “한중 청년 세대의 갈등 해소를 위해 한중을 넘어선 아시아를 키워드로 문화적 공감대를 넓혀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경록 기자

▶이하경=2018년부터 불거진 미·중무역전쟁과 올해 터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를 겪으며 세계가 다시 양대 진영으로 재편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나옵니다. 탈냉전이 한중수교의 바탕이 됐는데 이제 다시 신냉전이 도래한다면 한중관계의 후퇴가 불가피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다음 30년으로 나아가려 할 때 한중 앞엔 과연 어떤 도전이 기다리고 있는 건가요.

이하경 중앙일보 주필은 “한중이 현재 직면한 도전은 지난 30년 세월의 결과물로서, 우리로선 외교안보와 경제산업을 하나로 묶은 협의체 성격의 상시적 민관합동 비상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경록 기자

이하경 중앙일보 주필은 “한중이 현재 직면한 도전은 지난 30년 세월의 결과물로서, 우리로선 외교안보와 경제산업을 하나로 묶은 협의체 성격의 상시적 민관합동 비상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경록 기자

▶윤영관=한중은 근본적으로 아주 심각한 세 가지 구조적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중국이 한반도 문제를 항상 미국과의 경쟁이라는 맥락에서 파악한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중국은 한국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밀어내려 줄곧 노력하고 있습니다. 과거 이명박 전 대통령의 방중 시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한미동맹은 냉전의 유산”이라고 말한 건 이러한 중국의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한국의 입장에선 북한의 위협이 존재하는 한 한미동맹은 외교의 기본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바로 딜레마입니다. 두 번째 구조적 도전은 중국의 권위주의 정치체제입니다. 중국은 현재 패권경쟁 차원에서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세계질서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한데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이고 자유주의 세계질서 속에서 성장해 왔습니다. 세 번째 도전은 중국이 기본적으로 지역패권을 다지면서 아시아에서 위계적이고 수직적인 중화질서를 부활시키기를 바란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한국은 이미 수평적인 서구 국제질서와 주권평등을 강조하는 질서에 익숙해 있고 이를 당연시합니다. 양국의 시각이 부닥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위성락=한중관계가 직면한 최대의 도전은 사상 최악인 미·중관계라고 생각됩니다. 윤석열 정권은 미국과의 동맹 강화를 말합니다. 중국과의 관계에 대해선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지만, 가치외교를 강조하고 있어 그게 주는 간접적인 메시지는 읽을 수 있습니다. 한중관계가 이전 정권과는 달라야 한다는 이번 정권의 문제의식이 축약된 키워드가 바로 ‘상호존중’입니다. 사실 ‘상호존중’은 과거 진보 진영에서 대미 관계와 관련해 쓰고 싶어 했던 말입니다. 한데 지금은 보수 진영이 중국과의 관계에서 ‘상호존중’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배경엔 중국이 한국을 무시하고 존중하지 않았다는 인식이 깔려있는 것이지요. 중국 지도부로선 이를 예사로운 도전으로 볼 리가 없겠지요. 중국도 나름대로 상당한 정책적 고심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자칫 한국에 대한 강경 대응이 나올 수도 있다고 보입니다.
▶이하경=향후 양국관계에는 만만치 않은 도전이 기다리고 있군요. 그렇다면 미·중 갈등의 심화가 초래하는 도전이 더 큰 것인지, 아니면 중국이 한국을 과거와 같은 수직적 체계의 패러다임으로 붙들어 두려는 한중 양자 차원의 문제가 더 큰 것인지 궁금합니다.
▶서진영=두 가지 측면이 다 크고 또 중요합니다. 미·중 마찰은 세계적인 차원의 문제입니다. 미·중 간에도 상당한 인식 차이가 존재합니다. 미국은 아직도 급성장한 중국을 마음속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중국에 대한 공포인 일종의 ‘중국 공포증’이 밑바닥에 깔려있기 때문에 미·중 마찰을 과도하게 과장시키는 측면이 있습니다. 반면 중국 입장에선 국력이 신장한 만큼 자국의 위상과 영향력을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 욕구 자체는 정상적이겠지만 민족주의를 지나치게 고취하고, 자국의 힘을 과장하는 것과 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특히 중국 청년세대에서 과도한 민족주의 성향이 보입니다. 이에 따라 미·중 갈등은 과거 미국과 소련 같은 냉전적 대결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레토릭 면에서는 신냉전처럼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미국대로, 또 중국은 중국대로 현실의 한계를 인식하게 되면 결국은 대결로만 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미·중은 협력과 경쟁, 그리고 대결이 복잡하게 작용하는 복잡한 관계로 가게 됩니다. 정면 대결은 상당 기간 이뤄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시사를 던집니다. 한중관계나 한미관계에서 우리의 정책적인 스펙트럼을 긴 호흡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오늘 당장의 한미, 한중, 미·중 관계만 보면 안 될 것입니다. 냉전시대와 같은 양자택일이나 흑백논리로 접근했다간 자칫 우리만 곤란한 상황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하경=미·중 갈등 심화는 사실 한국 외교가 직면한 큰 시련입니다. 두 나라 모두 우리에겐 너무 중요하기에 우리가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할지는 너무나 미묘한 문제입니다.
▶위성락=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세계는 새로운 국제적인 분열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미국과 서방이 단합하고 중국과 러시아가 그 상대 진영에 서는 이 구조에서 한국이 선택할 여지는 많지 않아 보입니다. 한국은 결국 미국과 함께 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한국이 결정할 수 있는 건 미국과 어느 정도로 가까워질 건지, 중국과는 어느 정도로 떨어질 것인지 정도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미국 쪽으로 가까워지되 중국과 너무 멀지 않아야 합니다. 미국이 잡아당긴다고 훅 가고, 중국이 당긴다고 훅 쏠리는 등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제일 나쁩니다. 지난 30년간 우리가 외교의 일체성, 일관성, 지속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을러대면 따라올 것이라는 기대를 미·중에 심어준 게 아닐까 걱정됩니다. 사드 사태가 그런 사례입니다. 한국이 처음부터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해야 하는 안보적 이해가 있기 때문에 사드는 꼭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다면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미·중에 휘둘리지 않고 우리의 안보를 위해 사드를 배치할 수 있다고 주장해야 합니다. 우리로선 동맹인 미국으로 경사되더라도 중국과 그리 멀지 않은 좌표와 정향점을 갖고 대처해야만 미·중 대결 구도 속에서 우리의 이익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외교가 우왕좌왕하면 끝없이 휘둘리고 압력을 자초하게 될 것입니다.
▶서진영=일반적으로 강대국의 패권경쟁에 대응하는 방책으로는 편승과 세력균형, 헤징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미·중 경쟁에서 조건부 편승을 택해야 한다고 봅니다. 원칙적으로 미국에 편승하면서 전면적, 일방적 편승이 아닌 조건부 편승 입장을 견지하는 게 좋습니다. 즉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견지하면서도 중국을 적대시하지 않는 입장을 택해야 합니다.
▶이하경=한중이 다음 30년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적지 않은 장애물을 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도전은 어제오늘 하루아침에 생긴 게 아니고 지난 30년 세월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대 한국 정부의 지도자들이 특별히 걱정하고 있다는 목소리를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윤영관=한국의 지도자들이 이러한 도전들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을 보이거나 애매모호한 태도와 입장을 표명한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북한 요인입니다. 중국이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해 도발을 막고 비핵화 실현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구축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이나 연평도 포격 사건 때 중국이 보여준 태도는 우리의 기대에 크게 어긋났습니다. 중국 입장에선 북한의 비핵화 실현보다 북한을 완충지대로 유지하는 게 우선순위인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우리의 대중 경제 의존도가 높아 경제적 피해가 올 경우 국내적으로 정치적 반발이 생기고 이게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질까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은 ‘좋은 게 좋은 거다’ 식의 외교를 이어왔고, 할 말도 제대로 못하는 ‘조용한 외교’로 일관해 왔습니다. 이게 우리 국민들의 반중 정서를 자극해 오히려 한중관계를 더 나쁘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생각됩니다.
▶이하경=지난 30년의 한중관계를 보면서 중국이 보여준 태도에 대해서도 의문이 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사실 문재인 정부는 중국을 많이 배려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이 2017년 중국을 방문했을 때 중국이 홀대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45년 전인 1972년 2월 반공주의자인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공산 중국을 방문해 ‘세계를 바꾼 일주일(A week that changed the world)’을 보낼 때의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닉슨을 따라간 미국 기자들이 시골에 내려가 현지의 하급 관리에게 닉슨 방중에 대한 생각을 물었습니다. 어이없게도 “미국이 중국에 투항해 마오쩌둥(毛澤東) 주석과 함께 세계 혁명을 하려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평소 교육받은 대로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대로 전했다가는 큰일 나겠다고 판단한 통역이 이 대목을 고의적으로 누락시켰습니다. 전말을 보고받은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통역하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라고 칭찬했습니다. 닉슨이 미·중 화해를 위해 마오쩌둥을 만나러 왔지만 중국 정부는 미국을 원수로 생각하는 인민들에게 있는 그대로 알릴 수 없었던 것이겠지요. 그래서 ‘닉슨 투항’이라는 황당한 페이크 뉴스로 둔갑시켰던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 홀대 사건 직후 중국 인사로부터 들은 비사(秘史)입니다. 당시는 느닷없이 미국 대통령이 방문한 상황이라 인민의 혼란을 막아야 한다는 사정이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한중 관계는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까. 양국 수교 이후 25년간 최고의 경제 파트너였고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서진영=이를 설명할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지난 2008년 이명박 대통령 시기 중국은 한국이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한중관계를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로 격상시키자고 제안했습니다. 나중에 중국이 왜 이렇게 호의적으로 나왔나 알아보니 중국은 이명박 대통령이 뼛속까지 친미주의자라고 인식하고 그렇다면 ‘미운 사람한테 떡 하나 더 주자’는 식으로 양국 간 관계 격상을 추진했다고 하더군요. 문재인 대통령이 중국에 가서 수모를 당한 건 그가 이명박 대통령보다 훨씬 더 친중적이고 진보적이라는 걸 중국이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중국 입장에선 확실한 적이니 오히려 더 잘 대접해서 구슬려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고, 문재인 대통령은 이미 중국 편으로 기울었다고 여겨 쉽게 보고 소홀히 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위성락=한중관계에서 ‘동반자’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이 말이 갖는 함의에 대해서 우리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이 말을 국가 간 외교를 규정하는 용어로 쓰기 시작한 것은 중국과 러시아입니다. 동반자 관계는 동맹에 미치지 못하는 관계를 말하며, 동맹이 아닌 나라들 사이에 ‘파트너십’ 개념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중러는 한때 중소 분쟁을 겪을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고르바초프 시기 처음으로 중소 간에 건설적 동반자 관계라는 파트너십을 맺습니다. 이후 수사가 건설적-전면적-전략적으로 바뀌며 관계가 격상됩니다. 이는 미국을 의식한 행보입니다. 전략적 동반자 관계는 쉽게 말해 중소가 미국에 대항해 서로 대화를 한다는 뜻입니다. 한데 미국의 동맹인 우리가 중국과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구축하며 미국의 경쟁자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은 모양새가 됐습니다. 중국이 전략적으로 한국에 접근한 데 반해 우리는 아무 인식 없이 이를 받아들였기에 생긴 결과입니다.
▶이하경=세상은 돌고 도는 모양입니다. 동반자 개념이 냉전 시기 중소가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개념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최근 양상은 미국이 다시 중러 두 나라와 동시에 관계가 크게 나빠지는 신냉전의 시기에 접어드는 것으로 보입니다.
▶윤영관=우리가 현재 주목해야 할 게 바로 이 국제질서의 성격 변화입니다. 지금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트럼프의 미 대통령 당선, 세계 도처에서 집권한 포퓰리스트 정권, 민주주의의 후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은 모두 지난 5~6년 사이에 벌어진 일인데 이게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성을 갖고 벌어지는 일이라는 겁니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자리잡아온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지금 커다란 위기에 봉착해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특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자유주의 질서는 엄청난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이게 한국에 갖는 함의는 지대합니다. 한국이 개도국에서 세계 10위의 선진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국제환경이 바로 자유주의 국제질서였으니까요. 우리는 민주주의, 자유무역, 시장의 원칙과 규범을 강조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발전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외교의 기본을 설정하거나 중국과의 양자 관계를 고려할 때 이 자유주의 국제질서 수호를 밑바닥에 깔고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이하경=우리 외교가 국제정세의 급격한 변화 속에 그야말로 정신 바짝 차려야 할 때를 맞았습니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안미경중(安美經中)의 틀에 머물러 있던 시대는 먼 과거처럼 느껴집니다. 이젠 한국 외교가 진정한 역량을 보일 때입니다.
▶노재헌=근현대사에서 한국이 외교 역량을 발휘할 수 있고 또 했어야 할 몇 번의 터닝 포인트가 있었습니다. 물론 구한말 역사는 비극적으로 흘러갔고 6.25 전쟁 이후 냉전이 시작됐을 때는 한국이 어쩔 수 없이 강대국에 끌려갔던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으로 자주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던 때가 아마도 탈냉전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은 이 시기 북방정책을 통해 많은 일을 해냈습니다. 이후 30년 만인 지금 새로운 국제질서의 변동이 일어나고 있는데 한국이 국가 역량을 최대한 끌어모아 자주적 외교의 힘을 발휘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지금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국력이 신장됐고, 특히 경제력이나 문화의 힘은 세계를 선도할 정도로 커졌습니다. 이제는 사대주의적인 발상, 또는 미국이냐 중국이냐 같은 생각을 넘어 자주적인 외교 대전략을 수립하는 게 필요합니다. 우리의 경제력과 문화력을 지렛대로 해 지역주의의 틀 안에서 각국과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는 것도 생각해볼 만합니다. 특히 한·중·일이갖고 있는 협력의 공간은 무한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지역주의에 기초한 자주적 외교 역량을 발휘하기를 기대합니다.
▶이하경=국제질서의 변화 중심엔 중국의 부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과거 후진타오 주석 시기에 평화적인 부상을 뜻하는 ‘화평굴기(和平崛起)’를 강조했지만 시진핑 집권 이후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말하는 ‘중국몽(中國夢)’과 ‘인류운명공동체’를 주장합니다. 여기엔 중국 중심의 논리가 깔려있는데 이게 우리에겐 어떤 함의를 갖나요?
▶윤영관=중국몽과 인류운명공동체는 미·중 패권경쟁 속에 중국의 내부적인 이데올로기와 대외적인 이데올로기로 채택된 개념들로 보입니다. 중국몽은 중국 국민들의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를 북돋워 주고, 시진핑 주석 개인의 리더십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선전 용어로 알고 있습니다. 반면 인류운명공동체는 세계적인 차원에서 중국이 리드하는 세계를 엮어내는 대외적인 이데올로기 프로파간다의 의미를 갖는 것이지요. 즉 세계를 대상으로 중국 주도의 천하질서를 만들 때 이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입니다. 우리가 중국이 쓰는 용어의 정치적 의도와 내심을 알지 못한 채, 전략적 개념 없이 접근하는 경우엔 큰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위성락=중국몽과 인류운명공동체는 부상하는 중국의 세계관과 질서관을 반영한 것으로 중국 내부의 역학관계상 불가피하고 강력하게 제기될 수밖에 없는 개념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중국의 새로운 세계관 속에서 이웃이자 미국이 주둔하고 있는 한국은 1번 타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은 어떻게든 한국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거나 지금보다 더 중립화시키려 할 것입니다. 친중을 하게 하던지, 반중 정도를 낮추게 하던지, 어떤 조치든 취해야 하는 제1 타깃이 한국이라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로선 중국몽이나 인류운명공동체 같은 담론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중국이 하는 것을 정면 거부하거나 적대할 수는 없지만, 또 쉽게 동조하거나 그러한 개념을 복창하지는 않아야 할 것입니다. 미국의 동맹인 한국은 더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대처해야 할 것입니다.
▶이하경=한중 30년을 이어온 주요한 동력 중 하나가 경제 부문에서의 협력입니다. 그런데 최근 중국경제가 고전하고 있습니다. 원인은 다양합니다. 중국경제 내부의 문제도 있고 제로 코로나 정책에 따른 봉쇄 방침의 영향으로 경제가 큰 타격을 입어 2분기 중국경제 성장률이 0%대로 추락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따라 중국시장에 진출한 우리 기업과 한국경제도 직격탄을 맞고 있습니다. 국내 일각에선 중국이 아닌 ‘대안의 시장’이 필요하다는 말도 나옵니다.
▶윤영관=우리의 대중 경제 의존도가 높은 건 사실입니다. 어느 특정 한 나라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는 게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요. 다변화가 우리의 전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다변화가 시급해진 이유는 미·중대결구도가심화되고 신냉전이라 불리는 갈등이 격화되면서 이념싸움으로까지 번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권위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홍보하며 개도국 지도자들을 불러 모아 사상 교육하는 방법과 미디어통제 방법 노하우를 전수하고 있습니다. 또 대중 감시에 필요한 IT 기술을 수출하고 있습니다. 현재 중국은 세계 80여 국가를 대상으로 이런 홍보를 하고 있고 이를 미국이 용납 못하는 상황이지요. 미·중 대결이 격화되며 한국과 우리 기업들은 원하든 않든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문제는 정치안보 이슈가 경제 영역까지 지배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과거엔 정경분리 원칙에 따라 기업인들이 중국에 투자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정치논리가 앞서고 경제는 그 뒤를 따라가야 하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기업인들로선 이제 정치적인 위험요소를 효율성보다 앞서 생각해야 하는 시기를 맞았습니다. 시장 다변화를 위해선 동남아나 인도 같은 국가를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한 변수는 공급망 문제인데, 우리로선 만일 중국에서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게 됐을 때 어떤 대안이 있는지 시나리오를 준비해놓아야 할 것입니다.
▶위성락=우리가 중국에 과도하게 의존하면 어떤 위기와 부작용이 생길지에 대한 인식을 가졌어야 합니다. 일본의 경우엔 중국에 대한 투자를 독려는 하지만 몰입은 하지 않고 끊임없이 헤징을 합니다. 한국은 그런 전략적 헤징이 없이 교류하다가 사드 보복을 만나 당황하게 됐습니다. 지금은 미국이 미국 주도의 공급망에 들어오라고 하니 혼란이 왔습니다. 중국에 너무 깊숙이 들어가 있다 보니 갑자기 발을 빼면 당장 불이익을 보게될까 봐 부담스러운 상황입니다. 지금은 조용히 점진적인 방법으로 무역과 투자, 공급망 등에서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드 사태를 겪고도 전략적인 헤징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중국에 사드 보복을 풀라고만 요구했지 방향 전환을 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한데 이 전략적 헤징이 말만큼 쉬운 것은 아닙니다. 외교적 기술을 잘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
▶노재헌=일반 사람들은 그동안 대중 의존도가 높아서 좋았는데 이제는 너무 높다고 하니 우리가 다 잘못한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한국이 지금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사실 높은 대중 의존도가 한몫했습니다. 이제 자책보다는 다변화가 필요하다는 말이 더 좋은 표현 같습니다. 기업이 이전엔 경영실적이 좋지 않아 중국에서 철수했다면 이젠 정치안보의 비상 이슈로 철수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관련 민관 협의가 좀 더 유기적으로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제 대통령실에 경제안보비서실도 생긴 만큼 민관 협의체나 합의체가 만들어져 역할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하경=미국과 중국의 경제 관계를 ‘샴 쌍둥이’라고 했습니다. 심장과 폐 등 장기와 미세혈관까지를 모두 공유하는 운명공동체라는 말이지요. 미·중이 서로 경쟁하고 있지만 사실 미국 채권을 가장 많이 산 나라가 중국 아닙니까. 미국 기업이 도산하면 중국 경제도 힘들어지는 것이지요. 글로벌 경제시스템으로 묶여 있는 세계경제도 하나의 샴 쌍둥이가 아닐까요. 그런데 요즘 공급망에서 자원에 이르기까지 발작이 자주 발생하고 있습니다. 팔다리와 장기들이 떨어져 나갈 지경이지요. 한국은 지구적 차원의 대외 의존도(global interdependency)가 가장 높은 나라입니다. 그런데도 막연히 강대국들이 알아서 교통정리를 해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지나 않은지 걱정됩니다. 절박한 상황임을 인식하고 외교안보와 통상, 경제‧산업을 하나로 묶은 협의체 성격의 상시적 민관합동 비상시스템 구축이 필요해 보입니다.
▶윤영관=최근 미 학회 발표나 토론 중에서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퍼블릭 섹터(공공부문)’와 ‘프라이빗 섹터(민간부문)’의 관계성 문제입니다. 정부가 얼마만큼 민간에 개입해야 하느냐, 어떤 형식으로 개입해야 하느냐 등이 상황이 달라진 새로운 경제 질서의 탄생을 배경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제 과거 정경분리가 당연했던 브레튼우즈 체제의 자유무역 시대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오히려 그 정반대의 상황에 우리는 와 있습니다. 기업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 불가피한 상황이 된 걸 인식하고 얼마만큼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이하경=유럽에서 최초로 시민이 주체가 된 나라는 네덜란드입니다. 귀족이나 왕이 아니라 시민들 즉 기업가들의 권한이 컸기 때문에 그런 체제가 만들어진 것이지요. 기업가가 해외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동인도회사를 만들고, 광범위한 자본 조달을 위해 주식을 발행하고 펀드매니저 제도를 도입했지요. 그러나 지금의 국가 시스템은 민(民)이 아닌 관(官)의 시각에서 대부분을 결정합니다. 이제는 시장의 역동적인 현장에 서 있는 기업을 중시하는 새로운 거버넌스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민관 관계 조정이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요.
▶위성락=우리는 아직 정부와 기업 간의 좋은 협력 모델이 정착되지 않았습니다. 반면 서양은 협업의 사례가 꽤 있습니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과 같은 새로운 무역질서 하에 정부와 기업이 국가의 이익과 기업의 이익을 위해 밀접하게 협력한 사례가 있습니다. 반면 우리 대기업은 독자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일을 해결해왔고 정부도 기업이 알아서 할 일이니 정부는 별도의 입장이 없다는 식으로 대응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업으로선 정부에 믿음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정부가 기업의 신뢰를 얻는 게 앞으로의 과제입니다.
▶이하경=한중을 가리켜 흔히 “이사 갈 수 없는 이웃”이라고 합니다. 과거 중국의 한 학자는 한중이 역사가 가깝고, 문화가 가까우며, 지리도 가깝고, 감정도 가깝다는 4근론(四近論)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수교 30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상호 부정적인 인식이 팽배해졌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 간에는 서로에 대한 비호감도가 높습니다. 이유가 뭐고,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서진영=지난 6월 말 미국 퓨리서치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중국에 대한 비호감도가 80%에 달해 수교 이후 최고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특히 우리 청년 계층에서 중국에 대한 비호감도가 높은 데 그 이유는 한국의 주권적 사항에 대해 중국이 간여하고 또 중국의 태도가 고압적이라고 인식하는 데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에서는 한국에 대한 반감이 역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온라인상에서 퍼지는 데 그 주요 내용은 한국과 한국인, 한국 문화와 역사 등에 대한 것입니다. 한중 모두 사회 내부의 민족주의 정서 분출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데다 여기에 오해까지 겹치며 갈등이 증폭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장기적인 상호 교류와 협력 증대를 통해 상호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게 절실합니다.
▶윤영관=과거 정치 지도자들이 중국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후과
(後果)를 우리 청년들이 치르는 측면이 큽니다. 중국이 한국을 미국의 품에서 떼어내려 한다면 사실 중국은 한국에 더 어필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완전히 거꾸로입니다. 한국이 전략적 사고로 외교를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호의를 갖고 중국을 대하면 중국도 여기에 상응하는 반응을 할 것이란 ‘희망 사고(wishful thinking)’를 한 게 문제였다고 봅니다. 한국은 중국에 규범기반의 국제질서를 옹호하고, 북한의 위협 때문에 한미동맹이 필수이며, 한국 국민은 중화질서에 기반하는 게 아니라 주권 평등에 기초한 호혜 관계를 원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혀야 합니다. 그동안 한국은 그때그때 사안에 대응할 뿐 할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조용한 외교는 ‘폭탄 돌리기’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 부담을 청년 세대에 전가하게 된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 지도부는 전략적 판단과 원칙을 갖고 국민을 설득해야 합니다. 사드 사태와 같이 부당한 제재를 받았을 때, 또 그런 상황이 다시 벌어졌을 때,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전략적으로 판단해 국민에 설명하고 지지를 구해야 합니다. 호주가 그랬습니다. 피해가 예상되지만 단호하고 원칙적으로 대응해야 더 이상의 양국 관계의 악화를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하경=한중관계는 사실 좋을 때도 또 어려울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왕이면 이웃으로서 잘 지내는 게 당연히 좋겠지요. 수교 30년을 맞은 올해는 다음 30년을 기약하는 해이기도 합니다. 미래 한중 관계 30년 발전을 위한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서진영=과거 한중관계의 키워드 중 하나가 구동존이(求同存異)입니다. 갈등이 있거나 차이가 나는 것은 가급적 문제 삼지 말고 서로 이익이 되는 것을 찾아 확대, 발전시켜 나가자는 뜻이지요. 구동존이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그 바탕엔 양쪽의 공감대가 있다는 걸 전제로 해야 합니다. 서로 차이는 많지만 공동이익이 있다는 대전제에서 구동존이를 추구해야지, 그 전제가 흔들리면 안되는 겁니다. 이런 전제가 깨진 구동존이는 이익이 되면 하고, 안 되면 안 하는 그저 편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정책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한중 간 구동존이의 활용 수명은 이미 다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논리적으로나 실질적으로도 구동존이는 더는 작동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한중관계의 갈등을 해결하려 했던 마지막 시도가 사드에 대한 3불(不)입장 표명이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구동존이 정책에 따라 사드 문제를 대충 봉합하고 애써 눌러 없애려 했지만 실패했고 한중관계는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3불입장 표명은 아무 효과가 없었습니다. 구동존이의 다른 부작용은 우리가 이 원칙을 통해 이득을 보기도 했지만 여기에 충실하다 보니 대가도 치렀다는 점입니다. 그건 중국과 한국 사이의 차이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 부작용으로 중국이 한국을 오해하게 됐습니다. 즉 ‘한국은 중국의 주장에 따라오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거나 ‘잘만 구슬리면 미국 품에서 나와 중국 쪽으로 올 수도 있겠다’라는 잘못된 기대를 중국에 심어줬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그릇된 기대가 생겼습니다. 체제 문제는 놔두고 중국과 이익 문제만 이야기하다 보니 중국이 북한을 포기하고 한국에 올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갖게 된 것이지요. 한중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으로 화이부동(和而不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젠 중국에 대해 체제와 이념의 차이를 분명히 하자는 겁니다. 체제와 이념의 차이를 굳이 꺼내서 상대를 당황하게 만들 필요가 있나라고 생각한 게 구동존이적 사고였다면, 그 차이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하는 게 화이부동일 것입니다. 중국과 같은 체제로 갈 수 없다는 걸 분명하게 밝혀야 합니다. 그러나 냉전 시대와는 달리 21세기에는 체제와 이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함께 협력, 공존, 공영할 수 있다는 점을 설득하고 증명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당신과 내가 다르니 한판 붙자’는 냉전적 사고입니다. 그러나 탈냉전 시대엔 체제와 이념이 달라도 공존과 공영이 가능합니다. 공자 말씀을 보면 화이부동은 소인들이 아닌 군자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고급스러운 또는 고단위의 외교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중국과의 문제를 생각할 때 미국과의 관계, 일본과의 관계 등 구조적 맥락에서 한중관계를 설정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미국과의 동맹관계도 튼튼해야 하지만 한미일은 물론, 한·중·일 관계에서도 네트워킹을 잘 구축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대중 정책에서 일본과의 협력관계가 얼마나 중요하고 또 큰 자산이 되는지를 한국은 정확하게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잊지 말아야 할 건 우리가 미국이나 일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과도한 양보를 해선 안 되고 대단히 절제된 행동을 보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윤영관=우리가 중국에 대해 할 말은 하는 자세를 갖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한미 동맹관계에 대해 중국의 지도자나 정부에 분명하게 말하고 이해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북한의 위협이 존재하는 한 한미동맹은 한국외교의 기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더해 한중관계가 과거 중국 주도의 중화질서에서처럼 중국을 모시는 그런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주권평등과 상호존중, 호혜원칙을 기반으로 하는 평등한 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그래야만 한국에 대한 중국의 잘못된 기대를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국이 과도한 기대를 갖고 한국을 밀어붙이고 압박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중국은 상대 국가가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당당하고 일관된 외교를 펼칠 때 그것을 존중합니다. 싱가포르의 경우 남중국해 문제에서 중국이 협조를 요구하며 외교적으로 밀어붙였을 때 자신들의 원칙을 당당하게 밝혔습니다. 싱가포르는 통상 국가이고 나라의 사활이 통상에 걸려있기 때문에 항행의 자유 원칙이라는 국제규범을 따라야 한다며 중국과 입장이 다르다는 걸 분명히 밝힌 것이지요. 한국도 이런 당당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물론 중국을 불필요하게 적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위성락=우리 스스로 잘 처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얕보이지 않아야 하고, 동맹과 원칙, 가치관도 활용해야 합니다. 이제부터라도 중국이 한국을 쉽게 보지 않게 새로운 원칙과 방향을 가지고 새로운 관계를 쌓아가야 합니다. 그러면서 국민들에겐 중국을 적대하면 안 된다는 걸 설득해야 합니다. 또 중국에는 과거 중화질서가 21세기 한국에 통하지 않는다는 걸 정확하게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은 한국 정부에 ‘을’ 노릇을 강요할 순 있지만 그런 방식이 한국 국민에겐 안 통한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사드 사태 이후 반중으로 돌아선 한국의 여론을 보고 중국이 얻어야 할 교훈은 한국을 중국의 뜻대로 부리기 어렵다는 현실입니다. 한국을 견인해 복속시키는 것도, 동맹에서 떼어내 중립화시키는 것도 무리라는 점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노재헌=이제는 한중관계의 질적 성장이 필요하다는 걸 민간차원에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수교 이후 한동안 양국은 문화적 동질성을 강조했습니다. 한데 이젠 그 소재가 바닥이 난 게 아닌가 싶어요. 옛날이야기만 나오면 싸우는 게 한중의 현실입니다. 수교 30년이 됐지만 한중 양국이 여전히 서로를 잘 이해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한번 돌아선 민심은 정말로 바꾸기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과거나 현재에 집착하기보다 우리가 미래에 어떤 것을 함께 만들고 공유할 수 있을지, 또 어떤 공동 이익을 추구할 수 있을지 등 먼 미래를 향해 시선을 던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지금처럼 이념도 다르고 감정의 골이 깊어가는 상황에서 한중이 그나마 공감대로 삼을 수 있는 건 현실적으로 문화적인 부분 밖에 없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문화적 공감대를 어떻게 이어가야 할까요. 키워드는 아시아라고 생각합니다. 한중 젊은 세대의 중요한 갈등 이유 중 하나는 ‘서로 너무 잘났기 때문’이라고 보입니다. 특히 MZ 세대들이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한국도 잘났고, 중국도 잘났으며 우리 모두 잘났으니 서로 싸우지 말고 ‘잘난 아시아’를 한 번 만들어보자고 의기투합할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정치외교 분야에서는 이런 협력이 어려울 수 있겠지만 문화는 가능하다고 여겨집니다. 아시아 국가로서 한중이 힘을 모아 글로벌 리더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한중 젊은이들이 함께 일하고 즐기며 또 돈도 벌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역할은 정부가 나서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 우리가 시도했던 한중 청년 혁신센터 또는 창업센터도 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사실 현재 가장 큰 문제는 MZ 세대의 경우 기성 세대와 다르게 뉴미디어 같은 소셜 플랫폼에서 소통을 하는데 한중 간 공통의 플랫폼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다 보니 양국 청년 간 소통이 거의 단절이 된 상태입니다. 즉 노는 세상이 완전히 다르다는 뜻이지요. 노는 세상이 다른 결과 잘못된 선입관들이 확증편향 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선 새로운 뉴미디어 공간을 제공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예를 들어 메타버스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하경=한중관계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자세로 중국에 더 당당해져야 한다는 것이 오늘의 결론입니다. 두 나라가 과거나 현재에 집착하기보다 미래를 향해 시선을 던질 필요가 있다는 지적에도 깊이 공감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귀한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리=유상철 중앙일보 중국연구소장
◆한중비전포럼=한중 관계의 미래 좌표와 비전을 찾기 위한 전문가 포럼. 신정승 전 주중대사(동서대 석좌교수)가 위원장을 맡고 있다.

한중, ‘구동존이’ 정책 수명 다해 #서로 체제와 이념 다르다 말해야 #동맹인 미국에 경사되더라도 #중국과 멀지 않은 좌표 설정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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