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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의 세사필담

21세기 ‘한국책략’ 반도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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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쉿, 조용!” 워싱턴 참전용사 기념공원에 세워진 ‘19인 용사상’의 선두병이 발한 사주경계 명령. 장진호 혹한을 뚫고 퇴각하는 미국 용사들의 겁먹은 표정이 가슴을 친다. 중공군의 공세에 밀렸다. 영하 25도, 어느 나라인지 모른 채 파병된 산악에서 미국 병사 수천 명이 갇혔다. 미10군단 패잔 병력은 북한주민 10만 명을 태우고 흥남부두를 떠났다. 미국 병사들은 비로소 전쟁, 그것도 공산권과의 전면전임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화천에 집결한 인민군 7사단 참모장 이학구 총좌는 6월 25일 새벽 4시 허리춤 권총을 빼 들었다. T-34전차의 캐터필러가 굉음을 울리며 작동하기 시작했고, 곡사포 포신이 불을 뿜었다. 파죽지세로 남하한 7사단 기갑여단과 보병은 팔당 부근 한강 도하에서 제동이 걸렸다(페렌바크 『이런 전쟁』).

4만4000명 미국 병사 희생 딛고
전쟁 없는 70년 평화시대 누려
디지털시대 최대안보는 반도체
칩4동맹, 지정학적 비운 벗는다

같은 시각, 인민군 2사단 정예부대는 춘천을 공격했다. 홍천~원주 축을 공격할 부대였다. 사단장은 이청송 중장. 중국 항일의용군 출신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고, 소련의 대독전선에 투입됐다가 인민군에 투신한 베테랑이었다. 2사단은 소양강을 건너지 못했다. 춘천 봉의산에 집결한 한국군 6사단 야포부대와 보병의 공격에 전력 40%를 상실했다. 사단장은 김종오 장군(정병준 『한국전쟁』).

서울 함락 며칠 후 스미스(Smith) 부대가 일본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건너왔다. 7월 1일, 오산부근 고지에서 스미스 부대는 궤멸됐다. 패잔병은 천신만고 끝에 일본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5개월 후 장진호 전투에서 미국은 뼈저린 참패를 맛봐야 했다. 지난 7월 26일 공개된 워싱턴 내셔널 몰 ‘추모의 벽’에 새겨진 전사자는 3만6634명, 한국군 카투사 7174명, 총 4만3808명에 달한다.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인민군 총병력이 6만9000여 명, 미국은 그 절반 이상 꽃다운 청춘을 한반도에 묻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그 혹한의 역사와 전쟁체험을 증언해줄 사람은 거의 스러졌고 우리는 살육의 참상을 아예 지우며 살았다. 필자도 ‘전쟁 없는 인생’을 보낸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한국의 지정학적 운명을 이고 사는 게 버거웠던 탓일까. 한국이 개발한 초음속전투기 KF-21기를 시험 비행한 안준현 소령은 ‘가슴이 뭉클하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참화에 놀란 폴란드는 한국제 전차, 자주포, 장갑차 구입에 20조원을 편성했다. 한국 국회라면 그만한 예산투입에 난장이 됐을 거다. 남북공동연락소를 통보 없이 폭파하고, 핵무기 겁박에 남한을 패싱하는 김정은에게 그저 굽실거릴 뿐인 주사파 정치인들에겐 냉혹한 현실 판단이 불가능하다. 남한보다는 북한과 중국이 한국전쟁의 적의(敵意)를 더 증폭해 과잉생산했다는 사실 말이다.

원점에서 곰곰 따질 일이다. 디지털시대 최대 안보인 반도체가 그렇다. 반도체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두 개의 목표에 딱 맞아떨어지는 산업이다. 삼성과 SK가 사운을 건 반도체는 극일(克日)의 결집이자 지정학적 비운(悲運)을 벗어날 발판이다. 김종오 장군의 야포가 K2 전차로, 박격포가 한국 최초의 우주발사체 나로호와 다누리호로 도약한 데에는 선각자들의 반도체 집념이 있었다.

한국은 디지털시대 천마(天馬)와 비마(飛馬)를 생산하는 세계최대 갑마장이다. 미국 대통령 바이든이 눈독을 들일 수밖에. 하원의장 펠로시의 동선은 중국의 일대일로에 대응하는 인도 태평양라인, 여기에 한국이 핵심 역량국으로 우뚝 서 있다. 중국과 북한의 적의에 대적하고 제어하는 강산(强産) 최전방국. 만만한 나라가 아니다.

삼성과 SK 하이닉스는 디램(DRAM) 세계시장 72%, 낸드(NAND) 47%를 점한다. 모두 한국기술이다. SK 하이닉스는 238단 세계 최고층 낸드를 개발했고, 인텔 낸드사업부를 인수했다. 낸드 점유율은 곧 60%에 육박할 것이다. 감동적이다. 대만의 TSMC는 세계최대 위탁생산 업체다. 펠로시의 대만 방문 항의로 중국이 둥펑을 쏴대도 이런 시설을 포격하지는 못한다. 21세기 디지털 문명이 올스톱 된다.

삼성은 시안, SK는 우시와 다렌에 반도체공장을 운영 중이다. 미국 주도 ‘칩4동맹’에 한국이 이름을 올려도 치명적 리스크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도덕동맹, 기술동맹이지 단호한 ‘시장분할동맹’이 아니다. 수요와 공급은 서로 얽혀 있고, 중국도 내부수요와 기술격차를 감당해야 한다. 지정학적 운명을 재편하는 최대의 전략무기를 품에 안고 주저할 필요는 없다. 북경 눈치보고 평양 비위 맞춰 그동안 무엇을 얻었는가? 말은 그럴듯한 ‘균형외교’는 비굴함의 증폭, 북한의 오만과 중국의 동북공정을 북돋웠을 뿐이다.

예로부터 작은 땅덩어리 한반도에서 발생한 전쟁은 동북아시아를 뒤흔들었다(박태균 『한국전쟁』). 6·25가 그랬다. 반도체 핵심국이 된 지금은 세계가 휘청거릴 것이다. 산업 강국엔 역으로 전쟁수위가 낮아진다. 강산강병(强産强兵)으로 주변국 설움을 씻어야 할 때, 그 중심에 반도체가 있다. 21세기 『한국책략』이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