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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은주의 아트&디자인

유영국, 시대를 초월한 감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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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은주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파랑, 빨강, 노랑, 초록…. 그의 그림에선 초록도 다 같은 초록이 아니고, 파랑도 다 같은 파랑이 아닙니다. 영화 ‘헤어질 결심’(감독 박찬욱)의 주인공 서래(탕웨이)가 입었던 원피스처럼 ‘초록 같은 파랑’이 캔버스 안에 가득합니다. 작가가 고향 울진에서 매일 마주했던 산과 바다, 하늘은 그의 캔버스에서 깊은 선(線)과 색(色)이 되고, 마음 홀리는 풍경이 됐습니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1916~2002) 얘기입니다.

지금 서울 삼청동 화랑가에서 가장 붐비는 곳 중 하나가 국제갤러리입니다. 유영국 20주기 기념전(21일까지)이 열리고 있는 K1~K3 3개의 전시장에 관람객이 끊이지 않습니다. 갤러리는 작품 판매가 목적인 상업 공간이지만 지금 이곳 풍경은 공공미술관에 더 가깝습니다. 정말 다양한 연령의 관람객이 찾고 있고, 작품을 살펴보는 분위기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합니다. 벌써 4만5000여 명이 이곳을 찾았습니다.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된 작가가 갈수록 관람객을 사로잡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반세기 전에 그려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작품이 뿜어내는 현대적인 감각이 남다릅니다. 자신이 시대를 앞서갔다는 걸 작가는 일찍이 알았던 것일까요. “내 생애에는 작품이 팔리지 않을 거야.” 생전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는데, 지금 사람들은 그 그림 앞에서 탄성을 감추지 못합니다.

유영국, 산, 1974, 캔버스에 유채, 135x135㎝. 대구미술관 소장. [사진 국제갤러리]

유영국, 산, 1974, 캔버스에 유채, 135x135㎝. 대구미술관 소장. [사진 국제갤러리]

유영국(1916-2002), Workn 1969 Oil on canvas 136 x 136 cm .[사진 국제갤러리]

유영국(1916-2002), Workn 1969 Oil on canvas 136 x 136 cm .[사진 국제갤러리]

신기하게도, 평소 “추상이 어렵다”고 말해온 사람들조차도 이번 그림 속 선과 면, 그리고 짙은 초록과 파랑, 빨강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아챕니다. “산에는 봉우리의 삼각형, 능선의 곡선, 원근의 면, 다채로운 색 등 모든 게 다 있다”고 한 작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그의 화면엔 짙은 초록, 깊은 산그림자는 보여도 시대의 암울함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두운 바다를 표현한 듯한 짙푸른 화면 위에서도 눈부신 햇살 한 줄기가 눈에 띕니다. 이인범 전 상명대 교수는 이에 대해 “추상은 그가 새로운 세계를 꿈꾸고 구축하는 방식이었다”고 말했는데요, 그가 부단한 조형실험으로 도달한 ‘동시대성’이 새삼 놀랍습니다.

엄격할 정도로 단순한 선과 면, 그리고 다채로운 색채로 그는 우리 안에 있는 자연을 파노라마처럼 풀어놓았습니다. 우리는 유영국의 작품 안에서 우리 안에 있던 산과 바다를 다시 만납니다. 가장 가까운 주변 풍광에서 우주의 근원과 리듬을 포착하고자 했던 작가의 치열함이 이룬 성과입니다.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로 시작된 ‘유영국의 재발견’은 2018년에 이어 2022년까지 연결된 현재진행형입니다. 이번 자리가 ‘한여름의 열기’로 막 내리지 않고 우리의 문화 자산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유영국미술관 건립도 진지하게 논의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