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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애 사퇴, '만 5세 입학' 백지화 수순…교육 리더십의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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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박순애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취임 34일만에 자진 사퇴했다. 학제 개편안 혼선 등에 따른 사실상의 경질성 인사로 풀이된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두달여만에 뒤늦게 임명된 박 부총리가 조기 낙마하면서 교육 리더십 공백이 불가피해졌다. 학제 개편은 사실상 백지화되고, 주요 교육 정책 추진도 타격을 받을 전망이다.

박순애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국교육시설안전원에서 기자들에게 사퇴의사를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박순애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국교육시설안전원에서 기자들에게 사퇴의사를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박 부총리는 8일 오후 서울 한국교육시설안전원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퇴를 공식화했다. 지난달 5일 인사청문회 없이 취임한 지 34일 만이다. 이로써 박 부총리는 역대 5번째로 '단명'한 교육부 장관이 됐다.

학제개편·외고 폐지 동력 잃을 듯

박 부총리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제가 받은 교육의 혜택을 국민께 되돌려드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달려왔지만 많이 부족했다"며 사퇴의 뜻을 밝혔다. 이어 "학제 개편 등 모든 논란의 책임은 저에게 있으며 제 불찰이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오전 출근길 도어스테핑(doorstepping·약식문답)에서 인적 쇄신에 대한 입장을 묻자 "국민 관점에서 모든 문제를 점검하고 살피겠다"며 "필요한 조치가 있으면 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오전 9시 비상경제장관회의에 박 부총리가 불참하면서 부총리 사퇴설은 기정사실화 하는 듯 했다. 오전 내내 두문불출한 박 부총리 대신 교육부 관계자는 "(사퇴설에 대해) 전달받은 적 없다"고만 답했다. 하지만 결국 박 부총리는 오후 5시 30분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사퇴를 공식화했다. 윤 대통령의 "필요한 조치" 발언이 나온지 8시간 40분만의 일이었다.

사퇴의 결정적 원인은 만 5세 입학 정책이었다. 국정과제나 대통령 공약에 포함되지 않았던 만 5세 입학을 지난달 29일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갑자기 발표하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교원단체와 학부모 단체가 반대하고 나섰고 교육감들과 국회에서도 사전에 협의가 없었다며 반발했다.

업무보고에서 '외고 폐지' 방안을 발표한 것도 논란이 됐다. 교육부는 "자사고는 존치하면서 외고는 폐지하겠다"고 밝혔지만 학부모 반대가 거세지자 "아직 확정된 정책이 아니다"며 말을 바꿨다.

만 5세 초등취학 저지를 위한 범국민연대 회원과 학부모들이 5일 오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정부의 학제 개편안 철회를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만 5세 초등취학 저지를 위한 범국민연대 회원과 학부모들이 5일 오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정부의 학제 개편안 철회를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부총리가 정책 실패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만큼 학제 개편안과 외고 폐지는 동력을 잃을 것으로 보인다. 만 5세 입학안은 8일 교육부가 국회 교육위에 제출한 업무보고 자료에서도 삭제됐다. 대통령 업무보고에 포함됐던 만 5세 입학안이 불과 열흘 뒤 국회 업무보고에서는 빠진 이유에 대해 교육부 관계자는 "여러 내용을 축약해서 보고하는 과정에서 문장이 생략됐을 뿐 입장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만 5세 입학과 외고 폐지가 부총리 경질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만큼 교육계 안팎에선 정책을 지속하기 어려울 것이란 시각이 지배적이다.

34일짜리 부총리 가고 '교육 리더십 공백'

김인철 사회부총리 후보자 낙마 이후 뒤늦게 임명된 박 부총리가 취임 34일 만에 사퇴하며 윤석열 정부의 교육 리더십 공백도 장기화될 전망이다. 박 부총리는 정부 출범 이후 두 달 만에 늦깎이로 임명된 데다 '인사청문회를 거치지 않은 부총리'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어 운신의 폭이 좁았다는 게 교육계의 시각이다.

여기에 주요 과제로 내놓은 학제 개편안이 거센 반발에 부딪히며 사퇴에 이르게 됐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석 달 간허송세월을 보낸 셈이다. 한 국회 교육위원회 관계자는 "낙마한 김 후보자와 34일짜리 박 부총리에 이어 세 번째 사회부총리 지명인 만큼 인사 실패 부담을 안고 있는 대통령실이 새로운 후보자를 내놓기까지 꽤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리더십 공백이 길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산적한 교육 과제도 늦춰질 우려가 크다. 당장 올해 안에 발표하기로 한 고교 체제 개편안부터 타격을 받는다. 개편안에 따라 자사고와 외고 등의 운명이 결정되는만큼 현장의 관심이 높다. 이 밖에도 2022 교육과정 개편, 고교학점제 시행 방안, 대입 개편 등 서둘러야 할 과제가 쌓여있다.

특히 중장기 교육 정책을 맡게 될 국가교육위원회 출범은 더 늦어질 것으로 보인다. 사회부총리가 공석인 상태에서 대통령이 위원장을 먼저 임명할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국가교육위원회는 법에 따라 지난달 21일 출범할 예정이었지만, 총 21명의 위원 중 당연직 4명을 제외한 17명을 구성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교육 리더십이 부재한 가운데, 지방선거 이후 시·도 교육감이 교체된 지방교육 현장은 급변하고 있다. 예를 들어 부산, 강원 등에서는 학업성취도평가를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지만 아직까지 교육부 차원에서 학업성취도평가의 구체적인 방향은 나오지 않았다.

교원단체들은 박 부총리의 사퇴를 '당연한 결과'라고 평가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은 "장관 사퇴는 사필귀정"이라며 "남은 것은 만 5세 취학 정책의 전면 철회와 대통령 사과, 교육부 업무계획의 전면 수정"이라고 밝혔다. 교사노동조합연맹도 "초등 취학연령 하향의 실패는 교육 비전문가에 의한 아이디어 차원의 정책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주는 사례"라며 "향후 장관은 교육 전문성을 갖춘 인물로 임용하라"고 주장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도 "교육 현실을 무시하고 현장과 소통, 공감없는 정책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며 "만 5세 입학, 외고 폐지 등 현장이 공감하지 않는 정책은 공론화로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할 게 아니라 즉시 철회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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