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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동의 축적의 시간

혁신의 원동력은 대안적 세상을 상상하는 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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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누가 어떻게 세상을 바꾸나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막막할 때면 1984년 미국 슈퍼볼의 애플광고를 되돌려보곤 한다. 칙칙한 흑백화면에 똑같이 머리를 밀고, 회색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정렬된 의자에 앉아 커다란 스크린을 보고 있다. 한결같이 멍한 눈동자와 표정으로 스크린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는 지배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 유일하게 컬러로 등장하는 한 여성이 뛰어들어, 커다란 망치를 스크린에 던진다. 스크린이 폭파되는 바로 그 순간 ‘애플이 매킨토시 컴퓨터를 출시한다’는 자막이 올라간다. 광고역사에서도 유명한 이 1분짜리 비디오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IBM이 지배하는 세상은 조지 오웰의 『1984』와 같은 세계이지만, 애플은 개인의 취향과 권리가 존중되는 다른 세상을 꿈꾼다. 애플의 컴퓨터는 그런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할 것이다.’ 애플은 기술과 제품의 우수성이 아니라 그것들이 지향하는 대안적 세상의 가치를 선언하고자 했다.

2007년 최초의 아이폰이 출시를 예고했을 때 전 세계 많은 젊은이들이 매장 앞에서 며칠씩 텐트를 치고 기다렸다. 당시 우리나라가 출시하던 휴대폰들도 성능 면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차가운 눈을 맞으며 노숙을 하던 젊은이들이 열광한 것은 제품의 지향이지 성능이 아니었다.

혁신기술은 비전 담은 질문서 시작
기술선진국, 서사 만들 힘 가진 나라
노벨상, 새로운 장르 연 사람이 수상
대안적 세상 뭔지 고민할 수 있어야

1984년 미국 슈퍼볼에 등장한 애플의 매킨토시 컴퓨터 출시 광고. 모두가 지배자의 말을 멍하니 듣고 있을 때 한 여성이 망치로 스크린을 부숴버린다.

1984년 미국 슈퍼볼에 등장한 애플의 매킨토시 컴퓨터 출시 광고. 모두가 지배자의 말을 멍하니 듣고 있을 때 한 여성이 망치로 스크린을 부숴버린다.

기술은 생물처럼 진화한다. 그러나 두 진화과정이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변이의 의도성이다. 생물은 다음 세대로 유전정보를 넘겨주는 과정에서 무작위적인 오류에 의해 변이가 발생한다. 반면 기술은 기업가든, 연구자든, 소비자든 반드시 인간의 의도에 의해 변이가 일어난다. 혁신적 의도에서 혁신적 기술을 이끄는 최초의 질문이 탄생한다.

더 싸게, 더 빠르게, 더 효율적인 것을 만들고 싶다는 것도 인간의 의도이지만, 우리의 마음에 깊숙한 공명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다른 세상을 희망하는 의지다. 인간은 도구와 제작의 동물(Homo Faber)이기 전에 서사의 동물(Homo Narrans)이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간절히 희구하고, 옳고 그름에 목숨을 내놓고, 죽일 듯이 불화하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합의를 해가면서 문명을 만들어냈다. 새로운 서사가 옛날의 서사를 대체하면서 그들을 뒷받침하는 신기술들이 기술진화의 역사에 끊임없이 등장했다.

1984년 미국 슈퍼볼에 등장한 애플의 매킨토시 컴퓨터 출시 광고. 모두가 지배자의 말을 멍하니 듣고 있을 때 한 여성이 망치로 스크린을 부숴버린다.

1984년 미국 슈퍼볼에 등장한 애플의 매킨토시 컴퓨터 출시 광고. 모두가 지배자의 말을 멍하니 듣고 있을 때 한 여성이 망치로 스크린을 부숴버린다.

수년 전 듣고 아직까지 잊지 못하는 한 탁월한 디자이너의 에피소드가 있다. 기억을 되살려보면 이렇다. 그는 수년간 국제적인 컨퍼런스에 참여할 때마다 디자인의 구루라는 리더들에게 한 소식을 듣고자 집요하게 질문을 했다. ‘다음 디자인의 트렌드는 어떻게 될까요?’ 그 질문을 들은 구루들은 대게 심드렁하게 답했다. ‘잘 모르겠는데요’, ‘마케팅하는 사람들이 잘 알지 않을까요?’ 등등. 어느 해 질문을 바꾸었다. ‘다음 디자인의 트렌드는 어떻게 되어야 하나요?’ 이전까지 그렇게 들은 체 만체하던 디자인의 구루들이 갑자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를 쏟아냈다. ‘다음 디자인의 트렌드는 반드시 이렇게 가야 합니다.’ 나름 일리가 있는 듯도 하지만, 반드시 주류의 견해라고 볼 수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금과 다른 디자인의 세상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자신의 세계관과 서사를 주장하고 있었다. 나는 이 에피소드를 떠올릴 때마다 트렌드를 만드는 사람과 추종하는 사람, 오리지널과 패러디, 라이센서(licensor)와 라이센시(licensee), 문제 출제자와 문제 해결자의 차이를 절감한다. 그래서 후배 연구자들에게 이 이야기를 거듭 들려주면서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야심을 가지라고 권한다. 그 어떤 다른 상상이 있어야 자기만의 장르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과 다른 대안적 세상을 상상하는 힘은 현재의 상태를 바꾸는 원동력이다. 『정의론』으로 유명한 존 롤스는 지금 세상이 정의롭지 않다고 느낀다면 대안적 세상을 상상해보라고 권한다. 당신이 오늘 죽고 내일 갑자기 다른 세상에 태어난다고 하자. 워렌 버핏으로 태어날 수도 있고, 길거리의 노숙자로 태어날 수도 있다. 어떻게 태어날지는 사전에 알 수 없지만, 어떤 세상에 태어나고 싶은지는 지금 당신이 결정할 수 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 모든 것을 갖는 세상? 노력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의 소득을 강제로 똑같이 분배하는 세상? 등등. 이 질문에 대해 사람들은 여러 대안적 체제를 비교해서 사회적으로 최약자의 위치에 처한 사람에게 최대한의 보상을 하는 시스템을 선택한다. 우연으로 점철된 인간의 삶이 그렇듯 워렌 버핏으로 태어날 수도 있지만, 운이 나쁘면 노숙자로 살아가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를 최소 수혜자에 대한 최우선 배려의 원칙이라고 하는데, 중요한 것은 현재의 시스템과 추세를 막연히 받아들이기 보다 대안적 세상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현재와 다른 세상을 만들어가는 여정이 시작될 수 있다는 점이다. 정의론처럼 복잡한 문제에 대한 해답의 단초도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힘에서 찾을 수 있다.

1984년 미국 슈퍼볼에 등장한 애플의 매킨토시 컴퓨터 출시 광고. 모두가 지배자의 말을 멍하니 듣고 있을 때 한 여성이 망치로 스크린 을 부숴버린다.

1984년 미국 슈퍼볼에 등장한 애플의 매킨토시 컴퓨터 출시 광고. 모두가 지배자의 말을 멍하니 듣고 있을 때 한 여성이 망치로 스크린 을 부숴버린다.

기술도 마찬가지다. 오늘도 수많은 기업과 연구소, 대학의 실험실에서 또 그만큼 많은 연구자와 기술자·기업가들이 새로운 제품과 혁신적 기술을 만들어내기 위해 밤을 새고 있다. 혁신적 기술은 기존의 기술보다 성능이 더 뛰어난 것이 아니라 현재와 다른 대안적 세상에 대한 비전을 담고 있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미래학자 후안 엘리케스도 미래기술을 전망할 때 ‘무엇이 옳은가’라는 질문이 가장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그가 던진 질문의 예시 중 하나다. 세계적으로 10억 마리의 돼지, 14억 마리의 소, 200억 마리의 닭을 사육하고 도살하는 현재의 시스템, 이들을 키우기 위해 전 세계 1년치 농업 수확물 중 절반을 동물사료로 쓰고 있는 이 세상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가? 다른 대안적 세상을 상상할 수 없을까? 동물사육이라는 1만년 역사의 오래된 세상을 뒤집는 상상을 한다면 ‘대체육’이라는 기술의 대안이 눈에 들어온다. 대체육 기술이 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분야를 만들어낸 질문과 상상의 방향은 명확하다. 모든 기술과 제품, 서비스에서 대안적 상상은 가능하다. 인간의 삶을 한없이 편하게 해주는 디지털 세상을 다들 찬양하지만,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도 모른채 알고리즘이 모든 의사결정을 대신해주는 세상을 원하는가? 이런 상상들로부터 대체불가능한 서사를 가진 혁신적 기술이 싹튼다.

개인을 넘어 여러 사람들이 대안적 세상에 대한 담론을 공유하게 되면, 기술진화의 경로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규제가 형성된다. 한없이 커져만 가던 승용차가 작아지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 대기청정법이 제정되면서부터다. 연비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동차를 아예 팔지 못하도록 강제하면서 기업들은 어쩔 수 없이 연비개선을 위한 기술개발에 나섰고, 컴팩트한 디자인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대학과 연구소의 연구자들도 그 방향으로 논문과 특허의 주제를 찾기 시작했다. 배아줄기세포에 대한 규제가 생기면서 성체줄기세포 연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 것도 마찬가지다. 현재 탄소제로 기술이 화두가 된 것은 많은 사람들이 기후환경에 대한 위기를 공유했고, 지금과 다른 세상이 필요하다고 합의했기 때문이다.

1984년 미국 슈퍼볼에 등장한 애플의 매킨토시 컴퓨터 출시 광고. 모두가 지배자의 말을 멍하니 듣고 있을때 한 여성이 망치로 스크린을 부숴버린다.

1984년 미국 슈퍼볼에 등장한 애플의 매킨토시 컴퓨터 출시 광고. 모두가 지배자의 말을 멍하니 듣고 있을때 한 여성이 망치로 스크린을 부숴버린다.

기술선진국은 뛰어난 기술력이 아니라 대안적 세상에 대한 서사를 만들어내는 힘(discoursive power)을 가진 국가다. 글로벌 기술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기업의 정체도 마찬가지다. 더 성능이 뛰어난 기술과 제품이 아니라 대안적 세상을 지향한다는 서사를 가진 기업이다. 탁월한 연구자는 어떤가? 노벨상은 기존 연구를 개선한 연구자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지금껏 인류가 상상하지 못했던 세상을 꿈꾸고 그 지향으로 첫발을 내딛는 사람, 즉 새로운 장르의 문을 연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과학기술은 사실을 다루기 때문에 옳고 그름, 즉 가치를 따지는 당위의 영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인지 ‘영혼이 없는 과학기술자’라는 표현이 가끔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내는 탁월한 과학기술자가 되려면 대안적 세상을 상상하는 영혼을 가져야 한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넘었다고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나라가 참조하고 추종할만한 가치와 대안적 세상에 대한 담론을 제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선진국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상상하는 대안적 세상은 무엇인가?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