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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진보가 불평등 확대…사회적 약자 포용 정책 절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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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기술 진보의 부작용 줄이기

오종남 서울대 과학기술최고과정 명예주임교수, 전 IMF 상임이사, 리셋 코리아 운영위원

오종남 서울대 과학기술최고과정 명예주임교수, 전 IMF 상임이사, 리셋 코리아 운영위원

국제통화기금(IMF)은 2015년 전 세계적으로 심화되고 있는 소득 격차(Income Inequality)의 원인과 파급 영향에 관한 논문을 내놓았다. 논문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선진국의 소득 격차는 더욱 벌어졌고, 개도국에서도 교육·의료·금융에 대한 기회의 불평등이 여전하다고 진단했다. 그 원인을 분석한 결과 격차 확대는 선진국일수록 기술 진보의 영향이 가장 크고 다음으로 세계화가 뒤를 잇는다는 것이다. 아울러 경제발전 정도와 관계없이 저소득층에 대한 교육·의료·금융 등 분야의 정책과 노동 관련 제도도 불평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분석했다. 모든 나라에 다 통용되는 정책 처방은 없겠지만, 각국이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정책을 펴는 것이 격차 해소는 물론 좀 더 포용적인 번영을 이어가는 관건임을 강조했다.

기술 진보가 소득 격차에 미치는 영향이 세계화나 제도 등 다른 요인에 비해 크다는 IMF 분석을 보더라도 기술 진보와 격차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사실 기술 진보는 인류의 삶을 좀 더 안락하고 풍요롭게 하는 장점이 있다. 생산성 향상을 통해 경제성장에 도움을 주는 까닭이다. 하지만 기술 진보에 따라 피해를 보는 사람이 생겨날 수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고속도로를 이용할 때 하이패스 사용이 늘며 도로공사 직원이 줄어들게 되거나 은행에 자동현금인출기가 도입돼 일자리를 잃는 은행원이 생기는 경우가 단적인 예다. 요즘 식당에 가서 음식을 주문하려면 종업원 대신 기계를 상대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줄어든 일자리는 어떻게 메워야 할까?

기술 진보는 삶을 풍요롭게 하지만 피해자도 발생시켜
저숙련 노동자는 일자리 잃는 등 사회적으로 취약해져
사회적 약자와 함께 하는 ‘포용적 기술 진보’ 추구하고
재교육 프로그램 등 사회안전망 치밀하게 준비해야

디지털 기술은 격차의 엔진

퍼스펙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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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MIT대 에릭 브린욜프슨 교수와 앤드루 맥아피 교수는 “디지털 기술은 풍요의 엔진이면서 격차의 엔진이다”라는 주장을 폈다. 디지털 기술 시대에는 기술과 자본 면에서 우월한 위치에 있는 소수에게 부가 몰리게 되어 소득 격차가 더욱 벌어진다는 것이다. 소득 불평등 문제의 권위자이자 2015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미국 프린스턴대 앵거스 디턴 교수는 지난 30년 동안 이룩해 온 기술 진보는 숙련도가 높은 사람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까닭에 소득 격차가 커졌다고 지적한다. IMF 보고서에서도 같은 진단을 내놓고 있다. 기술 진보는 오히려 불평등을 키우는 측면이 있는 만큼, 이제 인류는 새로운 결단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어느 정도의 소득 불평등은 사람들의 근로 의욕을 고취하는 등 순기능을 한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격차가 심해지면 사회 안정을 해치고 저소득층의 일할 의욕을 떨어뜨려 결국엔 경제발전을 저해한다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세계는 코로나 극복 과정에서 소득이 낮은 나라일수록 기술 진보의 혜택에서 소외될 수 있음을 경험했다. 선진국과 저개발국의 백신 접종률을 비교해보면 이는 더욱 명확해진다.

오늘날 과학기술의 대부분은 전 세계 인구 중 구매력이 있는 10% 정도를 대상으로 개발되는 만큼, 나머지 90%의 사람들에게 적합한 기술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여기에는 독일 태생 영국의 경제학자인 에른스트 슈마허가 선봉에 서 있다. 첨단 기술은 아니어도 초급 기술 수준을 넘는 실용적인 중간 수준의 기술을 개발하여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대중에게 보급할 수 있다면 격차 문제 완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취지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도래와 함께 새로운 기술의 출현은 가속화될 것이다. 초지능·초연결·초실감을 기반으로 하는 지능정보 사회가 주는 편익 때문에 기술에 대한 기대감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높다.

정부는 시장 실패 보완해야

하지만, 이제 기술 진보는 명실공히 사람의 삶의 질 개선과 포용적 성장의 실천 수단이 되도록 해야 할 시점에 왔다. 기술 진보의 혜택이 보다 많은 사람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진지하게 고민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기술의 사각지대, 사회적 약자와 함께 하는 이른바 “포용적 기술 진보”를 추구하는 일이 급선무다. 기술 진보로 인해 실업에 처하는 등 불가피하게 취약해지는 경우에 대하여는 국가가 재교육 프로그램을 포함한 각종 사회안전망을 치밀하게 준비하여 시행해 나가야 할 것이다.

고령층이나 신체적으로 불편한 사람들이 각종 디지털 기기와 앱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일도 중요하다. 지하철 이용과 환승 시 에스컬레이터나 승강기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앱 지도를 개발하는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를 위한 기술은 제품의 규격화·표준화가 어렵고, 소비자층이 협소해 시장 진입과 성공이 쉽지 않은 제약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런 만큼 현장의 기술 수요를 좀 더 면밀하게 파악하는 동시에, 시장의 실패 영역을 보완하기 위한 공공의 역할을 크게 확대해야 할 것이다.

미·일, 기술 진보 따른 격차 해소 나서

디지털 디바이드(digital divide)라는 용어는 이제 우리에게 꽤 익숙하다. 디지털을 이용할 줄 아는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 간의 격차 문제가 사회 문제로 대두된다. 하지만 아직은 기술 진보에 따른 격차 문제는 그렇게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일본 등 주요 선진국은 기술 진보가 경제성장과 사회문제 해결을 함께 도모하는 방향으로 나서고 있다. 미국의 경우 정부가 특별기금(social innovation fund)을 설치하여 사회적 기업의 기술 혁신을 지원하고 있다. 일본은 민관 협력으로 의료·환경·에너지 등 국민 생활과 밀접한 분야의 기술 개발 활동을 활성화하고 있다.

선진국의 격차 해소를 위한 노력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4차 산업혁명이 지배하는 미래 사회는 어디까지나 기술이나 제품 그 자체보다는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기술 진보와 더불어 미래 사회가 좀 더 활력 있고 따뜻한 세상이 되기 위한 선결 조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기술 진보가 ‘다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는 것 아닐까?

기술 혁신이 바꾸는 일자리, 고용보험·국민연금도 그에 맞춰야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인공지능(AI)이나 로봇이 사람이 하는 일을 상당 부분 대신하게 될 전망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이나 의지와 무관하게 일자리를 잃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분야에 따라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날 것이라는 관측도 있지만, 노동시장의 불확실성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격차’ 문제가 계속 나빠질 수밖에 없다.

고용보험·국민연금 등 사회보험제도는 근로자들이 ‘비가 올 때’를 대비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현행 사회보험체계는 상용직 임금근로자를 중심으로 설계된 제도다. 그러므로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옷을 새롭게 갈아입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이미 플랫폼 일자리나 클라우드 작업처럼 새로운 형태의 노동이 나타나고 있다. 임시·일용직 노동도 늘어날 수 있다. 현행 제도에 따르면 이들은 사회보험 가입 대상에서 누락되기 쉽다. 게다가 일단 실직하게 되면 특별한 직무역량을 지니지 않는 한 조속한 재취업은 쉽지 않다. 그렇게 되면 연금 등 사회보험료 납입액도 줄어들어 보험재정을 취약하게 만들 수 있다.

현행 사회보험체계를 이대로 끌고 갈 경우 미가입 인구가 늘어 이들에 대한 사회보험 혜택은 충분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부가 격차 문제 해소를 위해 일정 부분 재정으로 떠안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질 수 있다. 그 결과 사회보험체계가 근본적으로 흔들릴 가능성도 있다.

정부 재정이 마냥 튼튼한 채로 남아있을 순 없다. 세수와 씀씀이가 일정하더라도 근로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됨에 따라 부족해지는 세수는 어떻게 메꿀 것인가? 이런 점에서 앞으로는 AI와 로봇에 세금을 물려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정부와 학계는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기술 혁신이 노동시장과 사회보험체계에 미치는 영향을 점검하고 관련 제도 개편을 논의하고 있다. 정부는 신속하게 개편안을 마련해 실행에 옮김으로써 사회안전망 확충과 격차 문제 완화에 실효성 있게 대처해야 한다.

오종남 서울대 과학기술최고과정 명예주임교수, 전 IMF 상임이사, 리셋 코리아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