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나쁜놈이 더 뻔뻔한 세상…거울처럼 비추고 싶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8면

 지난달 13일 국립극장에서 개막한 연극 ‘햄릿’. 햄릿 역을 6번 맡았던 배우 유인촌이 이번엔 비정한 숙부 클로디어스로 출연했다. [사진 신시컴퍼니]

지난달 13일 국립극장에서 개막한 연극 ‘햄릿’. 햄릿 역을 6번 맡았던 배우 유인촌이 이번엔 비정한 숙부 클로디어스로 출연했다. [사진 신시컴퍼니]

“‘햄릿’은 해석이 다양해서 배우한테 탐나는 작품이죠. 하나의 캐릭터로 끌고 가는 인물이 아니라 왕자이기도 하면서 시인, 철학자고 어떤 때 보면 무관이기도 하고요. 젊은 시절부터 황혼까지 삶의 많은 걸 터득하고 무덤가에서 명상하는 철학적 인간의 모습이죠.”

햄릿 역만 여섯 번 한 배우 유인촌(71)의 연극 ‘햄릿’ 예찬이다. 1981년 극단 현대극장의 ‘햄릿’을 시작으로 85년 호암아트홀 개관 공연, 89년 연출가 이해랑의 유작이 된 ‘햄릿’, 93년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 개관공연, 99년 제작까지 겸한 유씨어터 개관공연 등 햄릿과 함께 걸어온 그다. 6년 전 연출가 이해랑(1916~1989)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이해랑 연극상을 받은 원로 배우 9명이 뭉친 기념 공연 ‘햄릿’에선 “세계에서 가장 늙은 햄릿”(유인촌)이 됐다. 객석 점유율 100%를 달성한 당시를 끝으로 “더는 ‘햄릿’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그가 형의 왕위를 찬탈한 비정한 숙부 클로디어스가 되어 돌아왔다. 무대 인생 50년 만의 첫 악역 도전이라고 한다.

지난달 13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개막한 연극 ‘햄릿’은 시대 배경을 현대로 옮겼다. 덴마크 왕가란 설정과 캐릭터는 420여 년 전 셰익스피어의 원전을 고스란히 살렸다. 2016년 기념 공연의 극본 배삼식, 연출 손진책에 더해 전무송(81)·박정자(80)·손숙(78)·정동환(73)·김성녀(72)·윤석화(66)·손봉숙(66) 등 주연급 선배 배우가 조연·앙상블로 다시 뭉쳤다. 햄릿 역의 강필석(44), 오필리어 역의 박지연(34) 등 주역은 후배에게 물려줬다. 당시 병환으로 연습 중 하차한 권성덕(81)도 무덤파기 역할로 돌아왔다. “6년 전에 했던 분들 누구 한명이라도 빠졌으면 안 했어요. 그런데 다 하신다는 바람에….”(웃음)

지난 2일 국립극장 분장실에서 만난 유인촌은 “70~80년대 명동예술극장에서 선배들이 조·단역을 다 했는데 그 연극의 맛이 대단했다. 이번에 선배가 단역을 해주니 빈 구석이 없어지고 좋다”며 “햄릿만 할 때는 주변 인물에 대해 생각을 잘 못 했는데 이번에 왕을 하며 햄릿이라는 연극 자체를 다시 보게 됐다”고 소감을 밝혔다.

햄릿이 어떻게 다시 보였나.
“왕 입장에서 햄릿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젊은 애다. ‘저게 감히 얻다 대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노력했다. 왕이 너무 노쇠해버리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나도 머리색을 검게 염색했다.”
클로디어스는 어떻게 해석했나.
“동정받지 않는 악인으로 그리고 싶었다. 특히 2막의 기도하는 장면은 절대 참회가 아니라 하느님한테 대들 듯 자기 합리화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요즘은 다 뻔뻔한 세상이다. 잘못한 놈이 더 난리 친다. 나쁜 놈이 너무 많아서 더 나쁘게 하고 싶었다. 그 나쁜 걸 거울처럼 보게 하고 싶었다.”

“젊을 때는 연기를 힘으로 하고 에너지로 했다면 나이 먹으며 차분하게 가라앉고 더 내면으로 들어간다”는 그는 다시 선배 배우와 공연한다면 어떤 작품을 하겠냐고 묻자 고전을 짚어냈다. “‘리어왕’을 보면 재벌 기업가가 생각나죠. 자기 왕국을 이뤘지만 마지막엔 휠체어에 의지해 자식들 싸움을 보게 되는 사람도 있잖아요. ‘파우스트’나 ‘돈키호테’ 모두 세상의 거울 같은 이야기에요. 톨스토이의 ‘홀스또메르’는 ‘햄릿’보다도 많이 출연한 작품이죠. 짐승의 눈으로 본 인간 얘기에요. 아무리 좋은 옷 입고 화려하게 살던 귀족도 죽으면 살과 뼈는 아무 쓸모가 없더라는 대목에서 끝나죠. 연극이 끝나도 관객이 바로 일어서지 못할 만큼 고전의 여운이 깁니다.”

이번 연극은 개막 사흘 만에 배우들이 잇따라 코로나19 확진되며 공연이 중단돼 지난달 26일에야 재개했다. 폐막은 오는 13일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