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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거인의 발걸음'에 5개월간 신흥국서 51조 빠져나갔다

중앙일보

입력

제롬 파월 미국 Fed 의장. [AP]

제롬 파월 미국 Fed 의장. [AP]

'거인의 발걸음'에 신흥국 시장에서 외국 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다. 미국 등 주요국이 긴축에 속도를 높이면서 지난 3월 이후 5개월간 약 400억 달러에 육박하는 자금이 신흥국을 떠났다.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압력이 커지는 가운데 신흥국의 통화 가치 급락으로 수입 물가가 뛰고 국채 상환 부담이 커지면서 신흥국의 어려움도 커질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국제금융협회(IIF)는 최근 지난달 신흥국의 자본 순 유출 규모가 98억 달러(약 12조8000억원)라고 밝혔다. 지난 3월 이후 신흥국 시장에서 5개월 연속 자본 순 유출이 이어지고 있다. 2005년 통계를 처음 집계한 이후 최장 기간 자본 유출이다. 이 기간 빠져나간 외국 자본은 393억 달러(약 51조원)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JP모건이 집계한 통계에서도 자본의 신흥국 '엑소더스(탈출)'는 확인된다. JP모건에 따르면 올해 초부터 지난달 말까지 전 세계 투자자가 신흥국의 외국환 표시 채권 펀드에서 300억 달러(39조원)의 자금을 회수했다.

신흥국에서 자본이 빠져나가는 건 미 연방준비제도(Fed)의 공격적인 기준금리 인상과 경기 침체의 공포가 작용한 결과다. IIF의 이코노미스트인 조나단 포툰은 “Fed의 연속적인 기준금리 인상에 따른 달러 강세가 근본적인 원인”이라며 “과거엔 한 신흥국이 위기에 빠지면 다른 신흥국으로 자본이 옮겨갔지만 이번엔 신흥국 전체적으로 한꺼번에 자본이 빠져나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자본이 앞다퉈 신흥국 탈출에 나서고 있지만 올해 초만해도 분위기는 달랐다. 신흥국 자본시장에 지난 1월(107억 달러·13조9000억원)과 2월(111억 달러·14조4000억원)에는 외국 자본이 순유입됐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해 말과 올 초 많은 투자자가 신흥국에서 코로나19 유행이 끝나고, 강력한 회복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했다”며 “하지만 세계적으로 인플레가 나타나고 중국의 경제 성장이 둔화할 조짐을 보이면서 많은 투자자가 신흥국 자산에서 손을 떼고 있다”고 보도했다.

투자자의 불안한 심리에 기름을 부은 건 지정학적 갈등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격해지자 안전자산 선호하는 심리가 확산했다. IIF에 따르면 지난달 중국 채권시장에선 30억 달러(약 3조9000억원)가 빠져나갔다. 로이터는 지난 4일 “낸시 펠로시 미 하원 의장이 대만을 방문하면서 중국과 주변국 자본 시장의 긴장이 더 고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신흥국의 경제에는 이미 빨간 불이 켜졌다. 돈이 빠져나가면서 신흥국 통화가치는 급락했다. 올해 들어 지난달 말까지 미국 달러 대비 스리랑카 루피화 가치는 43.8%, 파키스탄 루피화는 25.5%, 방글라데시 타카화는 9.1%, 인도 루피화는 6.3%씩 하락했다.

통화 가치가 급락하며 이들 국가가 외화로 지급해야 하는 국채 상환 부담은 더 커지고 있다. 지난 3개월간 스리랑카는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했고, 방글라데시와 파키스탄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블룸버그는 지난 4일 “남아시아 국가들은 지난 10년간 낮은 비용으로 달러 등 외화를 조달해 큰 파티를 즐겼다”며 “이들 국가의 부채 문제는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의 속편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치솟는 연료 가격은 신흥국 경제를 더 깊은 늪으로 빠뜨리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파키스탄 행정부는 IMF의 구제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디젤 가격을 약 100%, 전기 가격을 약 50% 인상했다. 이는 파키스탄 인력거 운전사들의 대규모 시위를 촉발해 정치적 불안으로 번지고 있다.

성장률 전망치도 낮아지고 있다. 세계은행(World Bank)은 지난 6월 “개발도상국의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이전의 4.6%에서 3.4%로 하향 조정한다”고 발표했다. 식품과 에너지 가격의 급등, 미국의 금리 인상, 차입 비용의 급증 등이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신흥국의 경제 성장 둔화가 내년 세계 경제에 역풍을 가중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때문에 레베카 그린스펀 유엔무역개발회의 사무총장은 지난 6월 “주요 20개국(G20)이 신흥국에 부채 만기를 연장해주길 촉구한다”며 “신흥국의 부채 위기가 도미노처럼 붕괴할 가능성은 코로나19 유행 때보다 지금이 더 크다”고 경고했다.

한국 시장도 예외는 아니다. 블룸버그는 “외국인은 올해 2분기에 대만 주식 시장에서 170억 달러, 한국에선 96억 달러를 순매도했다”며 “기술 집약 산업 중심인 한국과 대만에서도 더 큰 자본 유출이 진행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국은 세계 금융시장에서 아직 신흥국 취급을 받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원화 약세가 이어지고 수입 물가가 올라 무역수지가 악화하면 국채 시장에서 자본이 빠져나가는 등 자본유출이 심각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위기를 진정시킬 수 있는 키는 미 Fed가 쥐고 있다. IIF는 “지난달 27일 제롬 파월 미 Fed 의장이 금리 인상 속도를 늦출 수 있다고 말한 뒤 7월 말 신흥국의 일일 자본 흐름이 개선됐다”며 “다음 달엔 순유입으로 전환할 가능성이 다소 생겼다”고 밝혔다.

스위스 줄리어스 베어 은행의 아시아 분석 담당 마크 매튜스 역시 “외국인 투자자들이 신흥국을 나가는 이유는 시장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미 Fed와 다른 중앙은행들이 긴축 통화 정책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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