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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막는 80만원 '명품 백신'…"무료로 놔준다" 尹공약 실현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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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데몰리션 맨’은 2030년을 배경으로 합니다. 미래를 그린 영화가 그렇듯 여기서도 참신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설정이 하나 있죠. 수많은 종류의 성병이 판을 치면서 남녀가 가상 현실에 접속해 성관계를 갖는다는 겁니다.

[정글]

영화 '데몰리션 맨'에서 남녀 주인공이 머리에 특수한 장치를 쓰고 가상 현실에서 성관계를 하려는 장면. 치명적인 성병이 유행한다는 영화 속 설정때문이다. 사진 영화 '데몰리션 맨' 캡처

영화 '데몰리션 맨'에서 남녀 주인공이 머리에 특수한 장치를 쓰고 가상 현실에서 성관계를 하려는 장면. 치명적인 성병이 유행한다는 영화 속 설정때문이다. 사진 영화 '데몰리션 맨' 캡처

좀 과한 상상력이지만, 최근 우리나라를 보면 얼추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성관계로 매개되는 질병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면서 남성들도 ‘가다실’을 맞아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이 강해진 거죠. 가다실은 자궁경부암을 일으키는 인유두종바이러스(HPV)를 예방하는 백신의 한 종류입니다.

자궁경부암의 발생 위치. 20년 전만 해도 여성의 목숨을 위협하는 무서운 암이었지만, 백신의 개발과 산부인과 의료 기술의 발전으로 정복 가능한 암이 돼가고 있다. 사진 미국 마요클리닉

자궁경부암의 발생 위치. 20년 전만 해도 여성의 목숨을 위협하는 무서운 암이었지만, 백신의 개발과 산부인과 의료 기술의 발전으로 정복 가능한 암이 돼가고 있다. 사진 미국 마요클리닉

대중매체에도 가다실을 맞는 남성이 등장하면서 백신 접종에 대한 심리적 장벽은 낮아졌습니다. 반면 가격 장벽은 높아지기만 하죠. 2년 전 60만 원대에 맞을 수 있었던 가다실 9가는 최근 2년 동안 두 차례 가격이 인상되면서 비용이 80만원에 육박합니다.

가다실 맞으러 비뇨기과를 찾았다 비용을 듣고 발길 돌리는 남성도 많다고 하죠. 그래서 대선 기간이던 지난 1월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가다실 9가에 대해 남녀 가리지 않고 비용을 지원해주겠다는 공약을 냈습니다. 이 공약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요. 남성들도 비용 걱정 없이 고가의 백신인 가다실 9가를 맞을 수 있을까요.

백신계의 명품, ‘가다실 9가’

세상에 백신으로 예방되는 암이 딱 하나 있습니다. 자궁경부암입니다. 자궁과 질이 만나는 길목에 생기는 암입니다. 대부분 HPV에 감염돼 생기죠. HPV 예방 백신을 맞으면 자궁경부암은 손쉽게 예방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산부인과 검진만 매년 잘 받으면 자궁경부암은 사실상 거의 걱정할 필요가 없는 질병입니다.

그런데 비용이 부담입니다. HPV 백신엔 2가인 서바릭스와 가다실 4가, 가다실 9가 이렇게 3가지가 국내에 도입됐죠. 여기서 2가, 4가, 9가는 HPV 유형 중 몇 가지를 예방할 수 있느냐를 나타내는 단위입니다. 가다실 9가는 HPV 유형 중 6번, 11번, 16번, 18번, 31번, 33번, 45번, 52번, 58번을 예방할 수 있죠.

HPV 백신 효과와 가격 비교. 자료: 모두닥(자체 조사와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 분석), 2022년

HPV 백신 효과와 가격 비교. 자료: 모두닥(자체 조사와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 분석), 2022년

자동차 BMW가 7시리즈가 5시리즈보다 비싼 것처럼, 9가 백신이 4가 백신보다 비쌉니다. 가장 비싼 가다실 9가는 백신계의 명품이라고 할 수 있죠. 몸에 항체를 제대로 만들려면 3번 접종해야 하는데, 한번 맞는 비용이 보통 20만원이 넘습니다. 의료정보회사 모두닥이 국내 산부인과를 조사하고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자료를 분석한 결과 가다실 9가 예방접종 가격은 최대 79만6500원, 평균 60만6014원이라고 하죠.

이 때문에 정부는 2016년부터 지원을 해주기 시작했습니다. 현재는 만 12~17세 여성 청소년과 만 18~26세 저소득층 여성은 무료로 백신을 맞을 수 있죠. 하지만 저소득층이 아닌 성인 여성과 남성이 백신을 맞으려면 비용을 온전히 부담해야 합니다.

HPV 백신 = 자궁경부암 백신?

가다실 9가 백신은 여성도 망설일 만큼 비싸니 남성들은 말할 것도 없죠. 사실 지금까지 가다실은 자궁경부암 예방 백신으로 많이 알려져 왔으니까요. 남성들이 자기 일이 아닌 것처럼 여길 만합니다. 우리나라만 그런 건 아닌지 미국 미시간대가 2010~2018년 18~21세 남성을 조사한 결과 접종률은 18%로 같은 연령대 여성 42%에 크게 못 미쳤죠.

하지만 가다실은 엄밀히 말해 자궁경부암 예방 백신이 아니라 HPV 예방 백신입니다. HPV는 자궁경부암뿐 아니라 두경부암의 원인으로도 알려져 있죠. 두경부는 뇌와 안와를 제외한 머리와 목 부위를 말합니다. 구인두암, 편도암, 갑상샘암, 구강암, 후두암 등이 여기에 속하죠.

HPV 백신이 처음 도입됐던 2006년 무렵만 해도 자궁경부암에만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편도암, 구인두암 발생에도 HPV가 크게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죠. HPV로 인한 발생률도 두경부암이 자궁경부암을 앞지르면서 남성도 HPV 백신 접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세계 의학계에서 커지고 있죠. 구인두암의 경우 남성 환자가 전체의 80%가 넘습니다.

HPV 바이러스. 다양한 유형으로 존재하며 이 중 일부는 피부에 종양을 일으키고 심지어 암을 발생시킨다. 자궁경부암뿐 아니라 다양한 두경부암을 발생시키는 것으로 드러났다. 사진 UCSF

HPV 바이러스. 다양한 유형으로 존재하며 이 중 일부는 피부에 종양을 일으키고 심지어 암을 발생시킨다. 자궁경부암뿐 아니라 다양한 두경부암을 발생시키는 것으로 드러났다. 사진 UCSF

그런데도 국내에선 자궁경부암에 국한된 백신으로 알려져 있는 건 2007년 가다실 도입 당시의 허가 기준 때문입니다. 당시 HPV 백신은 여성에겐 자궁경부암, 남성에겐 생식기나 항문 사마귀를 예방하는 효과·효능 때문에 식품의약품안전청의 허가를 받았죠. 이 때문에 여전히 국내에선 ‘HPV 백신 = 자궁경부암 백신’으로 통하고 있습니다. 고려대 의과대학 이재관 교수는 “HPV가 두경부 쪽에도 암을 많이 일으킨다. 아직 우리나라에선 남자의 두경부암 쪽에 연구 결과가 없어서 질병청에서 이 부분을 검토 중이다”고 말했습니다.

HPV는 인유두종바이러스라는 이름 그대로 상피세포(몸이나 장기의 표면을 구성하는 세포)에 유두, 즉 젖꼭지 같은 사마귀나 종양을 만드는 바이러스입니다. 200가지가 넘는 유형이 있는데, 그중 일부는 종양을 만들고 암으로 발전하죠. 이게 항문으로 가면 항문암이 될 수 있고, 편도로 가면 편도암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남성은 파트너인 여성의 자궁경부암 예방뿐 아니라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도 백신을 맞는 편이 낫습니다.

HPV 근절 위해 퍼지고 있는 백신 의무화

세계보건기구(WHO)도 HPV로 인한 암을 뿌리 뽑기 위해 세계적으로 예방 접종 의무화를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백신만으로 뻔히 예방되는 암이니, 백신만 의무화되면 천연두처럼 사실상 지구 상에서 사라지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죠.

호주와 캐나다는 이미 10여년 전부터 HPV로 인한 암의 근절을 위해 백신 의무화를 추진했습니다. 그렉 헌트 전 호주 보건 및 노인복지부 장관은 “2035년 호주에서 자궁경부암은 사라질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했죠. 이재관 교수는 “이미 세계적으로 HPV 백신을 국가 의무 예방 접종으로 하는 나라가 110개국이고, 그중 33개국이 남아에게도 접종한다고 한다”며 “질병관리청에서도 도입 여부를 타진 중”이라고 말했습니다.

호주는 여성 청소년뿐 아니라 남성 청소년에게도 무료로 HPV 백신을 접종한다. 사진 호주 암위원회

호주는 여성 청소년뿐 아니라 남성 청소년에게도 무료로 HPV 백신을 접종한다. 사진 호주 암위원회

이런 세계적 추세에 발맞춰 윤석열 대통령도 대선 후보 시절 HPV 백신을 맞는 남성에게도 비용을 지원해준다는 공약을 냈습니다. 이 공약은 지난 1월 21일 국민의힘 유튜브 채널인 ‘오른소리’에 짧은 영상으로 올라왔죠. 많은 사람이 “이건 정말 좋은 정책”, “진짜 가다실 비싼데, 잘 됐다”, “이런 세심한 것까지 챙겨주니 너무 좋다”며 반겼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돼가고 있을까요.

우리나라도 남성의 HPV 백신 무료 접종 이뤄질까

현재 질병관리청에선 남성 청소년에 대한 HPV 백신의 국가 무료 접종에 대해 비용-효과 분석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내년 1월까지 분석이 진행됩니다. 그리고 올해 10월부터 내년 3월까지 국가 필수 예방 접종으로서 HPV 백신을 도입하는 게 타당한지 우선순위 평가를 할 예정이고요. 권근용 질병관리청 예방접종관리과장은 “비용 효과성이 있고, 국가에서 지원하는 예방 접종으로 도입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근거가 마련되면 내년에 예산을 확보해서 2024년부터 실시할 예정”이라고 말했습니다.

18세 미만 남녀 청소년 모두에게 HPV 백신을 국가에서 무료로 접종하는 내용의 감염법 예방법 일부개정법률안도 더불어민주당 최혜영 의원의 대표 발의로 국회에 제출돼 있습니다. 질병관리청에서 근거를 마련하면 법을 개정해서 시행할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예산 문제로 남녀 성인에게는 무료로 제공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가다실 9가는 고가이므로 상대적으로 저렴한 서바릭스와 가다실 4가가 무료 접종될 전망입니다. 현재 여성 청소년과 저소득층 성인 여성에게 무료 접종하는 HPV 백신에도 가다실 9가는 빠져 있고, 서바릭스와 가다실 4가가 제공되고 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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