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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 식량 안보 초비상]곡물 자급률 20%, 초국적 농기업에 휘둘려…국내 안정적 생산 유지에 국민 생존권 달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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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호 0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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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솟는 국제 곡물 가격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다. 두 나라의 전쟁이 방아쇠를 당긴 건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곡물 가격 급등을 설명할 순 없다. 이미 코로나 팬데믹 여파로 건재하던 국제 물류망에 대한 신뢰가 크게 훼손됐고 더 근원적으로는 기후변화가 배후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2007~2008년 식량 위기를 계기로 모아낸 지혜들을 통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15년 전의 식량 위기는 ‘값싼 먹거리 시대의 종언(the end of cheap food era)’을 고하는 분기점이었다. 기후 위기가 더해지면서 농산물 교역 조건이 장기적으로 수입국에 불리하게 전개될 것이란 경고이기도 했다. 당시 곡물가 상승이 수출국 농민의 소득 증대로 연결되기보다는 초국적 농기업들의 이윤 폭등으로 이어졌고, 국제 밀가격 상승분의 절반이 투기 요인으로 밝혀질 정도로 국제곡물시장이 투전판으로 변한 사실도 드러났다. 이후 초국적 농기업들은 해외농업개발사업에 잇따라 뛰어들어 저개발국 농지와 숲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돈벌이가 되는 사탕수수·팜유·코코넛 농장 등을 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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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이런 일련의 사태를 계기로 유엔 등 국제사회는 농업과 먹거리를 지키는 것은 초국적 농기업이 아닌 소규모 가족농이란 점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2014년을 ‘가족농의 해’로, 2019~2028년을 ‘가족농 10년’으로 선포한 게 대표적이다. 2018년 12월 유엔 총회에선 식량 주권을 강조한 ‘농민과 농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 선언’도 채택됐다. 이 같은 흐름은 안정적인 먹거리 확보는 초국적 농기업이 주도하는 자유무역이 아니라 농민이 지키는 튼실한 지역 농업이 필수라는 국제사회의 합의가 구체화되는 궤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 농업에 있어서는 여전히 남의 나라 얘기였고 전환의 모색이 이뤄지지도 못했다. 그 사이 한국 농업은 더욱 어려운 지경으로 치닫고 있다. 15년 전 식량 위기의 교훈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말 이후 중단 없이 추진된 개방 농정의 결과는 파탄 지경에 이른 농촌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농업 예산만 봐도 국가 전체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계속 줄어들었다. 식량 위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관성화된 정책 틀도 바꾸려 하지 않았다. 2009년 5.9%를 넘었던 농업 예산 비중은 지난해 2.8%로 주저앉았다. 그 결과는 고스란히 곡물자급률과 식량자급률로 나타났다. 곡물자급률은 2009년 29.6%에서 2020년엔 20.2%로, 식량자급률은 같은 기간 56.2%에서 45.8%로 내려갔다. 농림축수산물 무역 적자 규모도 같은 기간 164억 달러에서 300억 달러로 두 배 가까이로 늘었다.

식량자급률을 45.8%라도 지탱할 수 있는 건 쌀 덕분이다. 쌀을 제외한 식량자급률은 10.2%에 불과한데, 이젠 쌀 자급률마저 무너지는 건 아닌지 심히 우려되는 사태가 진행되고 있다. 지난 10년 새 경작지가 10%나 사라져버렸다. 특히 논은 15% 줄었는데 그중 3분의 2가 수리답이었다. 막대한 토건 예산을 들여 만들어놓은 수리답의 12%가 사라진 것이다. 한국보다 두 배 많은 인구에 경작지 면적도 20배나 되고 2모작도 가능한 필리핀이 1980년대 쌀 수출국에서 현재는 쌀 수입국으로 전락한 걸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밀은 1인당 소비량이 쌀의 절반 수준을 훨씬 넘어 이젠 ‘제2의 쌀’이 됐지만 자급률은 0.8%에 불과한 실정이다. 그동안 민간 분야에서 힘을 모아 우리밀 확대 노력을 해왔지만 국내외 가격 차와 품종·제분 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자급률 1%를 넘지 못하고 있다. 정부의 밀 보급종 공급 물량이 벼의 2% 수준이란 게 밀 생산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준다.

만주와 한반도가 원산지로 알려진 콩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한때 90%를 넘던 콩 자급률은 현재 30%까지 떨어졌다. 콩 생산비도 10년 전에 비해 70% 이상 올랐지만 판매 수입은 거의 제자리다 보니 순수익이 10년 전의 35% 수준으로 폭락했다. 소비자가격에서 유통비용이 차지하는 비중이 쌀의 1.5배에 달하는 불합리한 구조도 콩 생산량 증가를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콩 자급률 증대를 기대하는 건 언감생심이다.

낮은 곡물자급률의 주된 원인 중 하나로 꼽히는 사료용 곡물 수입은 1960년대 말 축산을 장려하기 시작하면서 사료의 자급 기반을 고민하지 않은 결과다. 배합사료 자급률은 25%에 불과하고 사료 곡물에 사용되는 국내산 비중도 3%로 매우 낮은 수준이다. 사료 곡물의 수요 증대가 국내 농업 생산의 확대로 연결되지 못하는 기형적인 구조가 수십 년째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최근의 곡물 가격 급등 사태에 직면해 낮은 자급률에 대응하기 위해 당장 필요한 조치는 비축 물량의 확보라고 할 수 있다. 급변하는 외부 환경에 따른 충격을 최소화하려면 안정적인 비축이 필수라는 점에서다. 하지만 주요 곡물의 재고율은 글로벌 식량 위기에 매우 취약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 2020년 곡물자급률이 1%도 안 되는 옥수수의 재고율은 6.7%로 FAO 권장 재고율 17~18%를 크게 밑돌고 있다. 콩도 8.2%에 불과하다. 곡물의 안정적 생산은 말할 것도 없고 안정적 확보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기후 위기와 코로나 팬데믹, 전쟁 등이 겹치며 국제 곡물 가격이 들썩이고 있는 상황에서 자국 내 생산이 전제되지 않는 곡물의 안정적 확보는 허구일 뿐이다. 코로나 사태 이후 주요 수출국들이 곳간을 걸어 잠근 사실도 유념해야 한다. 값싼 먹거리 시대엔 달러와 자유무역이 모든 걸 해결해 줬다면 기후 위기 시대에는 자국 내 안정적인 생산을 유지하는 게 식량 위기 극복의 최대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하지만 농지가 부족하다면서도 10년간 농경지의 10%가 사라지고, 산지 쌀값은 1년 새 20% 이상 폭락하고, 농지의 4%가 휴경지로 묵혀지고 있는 현실이 식량 위기 시대 대한민국의 민낯이다.

농업과 먹거리에 대한 결정권은 농민과 국민에게 있고 자유무역의 최대 수혜자인 초국적 농기업에 있지 않다는 선언이 바로 ‘식량 주권’이다. 마침 새 정부 국정과제에도 농업직불금 5조원 확충 등 ‘식량 주권 확보와 농가 경영 안정’ 방안이 포함됐다. 유엔 농민권리선언도 이런 권리를 보장하는 게 국가의 책무라고 강조하고 있다. 기후 위기에 강한 농업, 식량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국민의 밥상을 만드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국가적 과제가 됐다.

윤병선 건국대 경제통상학과 교수. 건국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산업경제학회장과 유엔농민권리선언포럼 대표 등을 지냈으며 현재 농림축산식품부 푸드 플랜 현장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푸드 플랜, 농업과 먹거리 문제의 대안 모색』 등의 저서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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