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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트가 인정한 명기, 97개 건반 울림 깊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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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호 19면

[쓰면서도 몰랐던 명품 이야기] ‘뵈젠도르퍼’ 피아노

황금색 로고가 빛나는 피아노 명기 ‘뵈젠도르퍼’. 오스트리아 황실과 음악 도시 비엔나가 사랑했던 제품으로 유명하다. [사진 뵈젠도르퍼]

황금색 로고가 빛나는 피아노 명기 ‘뵈젠도르퍼’. 오스트리아 황실과 음악 도시 비엔나가 사랑했던 제품으로 유명하다. [사진 뵈젠도르퍼]

음악이 좋다. 하루를 통틀어 음악이 흐르지 않는 시간이란 작심하고 글쓰기에 집중하거나 잠잘 때 정도랄까. 한 번 전원 스위치를 올린 진공관 앰프의 불빛은 쉽사리 꺼지는 법이 없다. 나의 공간에서 편하게 듣는 음악이 시들해지면 콘서트홀을 찾는다. 살고 있는 일산에서 예술의 전당 혹은 롯데 콘서트홀까지 가는 길은 꽤 멀다. 게다가 빈번한 교통체증으로 대전까지 가는 시간과 별 차이가 없다. 쉽게 다가서기 어려운 산속에 콘서트홀을 만든 무신경은 잘못됐다. 나뿐 아니라 서울에 사는 이들도 음악 한 번 제대로 듣기 위해 들이는 수고가 만만치 않다. 국제도시 서울의 실상이다.

이렇게 귀찮고 번거로운 줄 알면서도 왜 우리는 콘서트홀을 기꺼이 찾아갈까. 이유는 단 하나, 실연의 감동은 대체될 수 없다는 걸 알아서다. 음악 애호가들은 연주되는 시간 동안만 유지되는 몰입의 기쁨을 사랑한다. 단 한 번의 공연을 위해 들인 연주자들의 보이지 않는 시간까지 의미화시킨다면 허투루 들을 음악은 하나도 없다. 어쩌면 번거로운 과정과 불편의 감수까지가 음악 사랑의 방법일지 모른다.

전 세계 유명 콘서트홀을 얼추 다녀봤다. 한 도시가 어떻게 예술을 대하는지 태도와 진심을 읽게 된다. 사람들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시의 중심에 있고 하나같이 건물이 아름답다. 기품과 격조의 공간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게 콘서트홀이다. 라이프치히 게반트 하우스, 베를린 필하모니, 암스테르담 로열 콘서트 헤보우, 빈 뮤직페라인, 런던 로열 페스티벌홀, 밀라노 라 스칼라 오페라극장…. 음악의 아름다움을 담아줄 건축과 관람객의 시선이 닿는 내부 시설의 호화로움은 시대의 최고 역량을 담은 결정체였다. 이들 콘서트홀에 들어선 순간의 숨 막힐 듯한 압도감은 여전히 선명하다.

음악은 콘서트홀에서 듣는 게 제일 좋다. 연주자들의 움직임과 표정에서 느껴지는 생생한 교감은 음악을 듣는 시간마저 입체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게다가 공간의 고유한 울림이라 할 홀톤의 독특함은 음악의 묘미를 배가시킨다. 악기의 배음과 잔향까지 느껴지는 정밀한 음향은 음악의 재료가 되는 소리의 아름다움을 증폭시킨다. 연주자의 감정마저 그대로 전이되는 음악적 소통의 일체감이 감동을 준다. 그 황홀한 떨림의 순간을 경험하지 못한 음악은 반쪽의 감상에 머무른다. 콘서트홀에서 듣는 음악은 매번 기대를 넘는 쾌감으로 우리를 무너뜨린다.

‘뵈젠도르퍼’의 그랜드 피아노 임페리얼. [사진 뵈젠도르퍼]

‘뵈젠도르퍼’의 그랜드 피아노 임페리얼. [사진 뵈젠도르퍼]

콘서트홀에서 들었던 여러 음악 가운데 피아노곡을 좋아한다. 영롱한 음의 여운과 포효의 에너지가 양립하는 피아노의 다이나미즘(활력)이 다가와서다. 피아노 한 대의 음량이 큰 연주공간을 압도한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오케스트라와 맞서는 당당함으로 연주를 이끄는 피아노 협주곡은 어떤가. 피아노가 악기의 제왕이란 말을 수긍하게 된다.

전 세계 콘서트홀의 대부분은 ‘스타인웨이 & 선스’사의 피아노를 쓴다. 아마도 점유율 90% 이상일 것이다. 스타인웨이 말고도 좋은 피아노를 만드는 회사가 많지만 세상의 콘서트홀이 온통 스타인웨이를 쓰는 이유가 궁금했다. 연주자와 연주 홀 담당자를 두루 만나봤고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유명 브랜드에 대한 신뢰감과 화려한 음색이 풍부한 음량으로 나오는 스타인웨이의 특성 때문이란다. 연주가는 자신의 연주를 도드라지게 하고, 연주 홀은 음향효과가 극적으로 이어지는 장점을 포기하기 어려웠던 셈이다.

세계 3대 피아노 콩쿠르 가운데 하나라는 쇼팽 콩쿠르에 어떤 피아노가 쓰이는지도 알아봤다. 스타인웨이·파지올리·야마하·가와이 그랜드 피아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규정이 있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는 최근 이들 피아노 외 중국제 피아노 양쯔를 포함시켰다는 말이 들린다.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 얼마 전까지 들어있던 피아노의 명가 ‘뵈젠도르퍼’가 빠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가장 독특한 음색과 울림을 들려주는 피아노는 뵈젠도르퍼였기 때문이다.

악기의 중요성을 모를 리 없는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 변화가 생겼다. 전통의 명기가 탈락하고 ‘듣보잡’ 신예가 등극하는 모양새다. 콩쿠르 내부 사정을 헤아리기 힘들지만 모종의 힘이 작용하고 있는 건 분명했다. 2008년 일본의 야마하가 전통의 명가 뵈젠도르퍼를 사들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뵈젠도르퍼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뵈젠도르퍼는 비엔나에서 스타인웨이보다 먼저 출발했다. 1828년 과격한 연주로 여러 피아노를 망가뜨린 음악가 리스트를 만족시킬 만큼 완성도 높은 제품을 내놓은 회사다. 리스트가 인정한 피아노란 이유로 단번에 유럽 최고의 피아노로 등극하게 된 이력을 갖고 있다. 이후 오스트리아 황실과 연주 홀은 뵈젠도르퍼의 고정 납품처가 된다. 세련된 음악의 도시 비엔나가 선택하고 사랑한 뵈젠도르퍼의 신화는 계속 이어진다.

피아노는 88개의 건반으로 음악을 표현한다. 하지만 뵈젠도르퍼는 8옥타브를 커버하는 97개 건반을 이용해 단 길이 290㎝에 달하는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 임페리얼을 만들어낸다. 놀랍게도 1900년의 일이다. 임페리얼의 표현력과 음색에 착안해 바르톡, 드뷔시, 라벨은 새로운 곡을 작곡할 정도였다.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가운데 키에프의 성문은 이 피아노를 염두에 두고 작곡됐다. 이후 임페리얼이 콘서트홀 피아노의 원기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알프스에서 자생하는 가문비나무와 삼나무를 5년 이상 건조시켜 사용하고, 20t 넘는 현의 장력을 견디는 견고한 프레임이 들어가는 게 뵈젠도르퍼다. 본체를 받치는 지주와 외관을 두르는 림의 설계와 향판은 현악기와 같은 독특한 공명을 일으키는데 마치 노래하는 듯한 울림의 바탕이다.

뵈젠도르퍼에는 익숙하게 듣던 스타인웨이풍의 밝고 화사한 음색 대신 음영 짙은 사물을 보는 듯한 깊이감이 더해져 있다. 낮은 음은 묵직하게 높은 음은 따뜻하게 느껴진다. 빈의 뮤직페라인 황금홀에서 들었던 이보 포고렐리치의 피아노 연주는 잊히지 않는다. 빛나는 연주만큼 눈에 들어온 것은 피아노에 새겨진 고딕체의 로고 ‘뵈젠도르퍼’였다. 숨죽여가며 집중했던 피아노의 음색은 황금홀의 색채와 어울리는 금색 같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같은 건물에 있는 뵈젠도르퍼 매장에서 건반을 눌러봤던 피아노의 음색도 다르지 않았다. 최근 하우스 콘서트룸을 만들고 있는 친구에게 피아노만은 뵈젠도르퍼를 들여놓으라고 조언했다. 이유를 묻자 자신 있게 답해줬다. 뵈젠도르프 아니면 감흥이 떨어지는 피아노곡이 너무 많기 때문이지. 

윤광준 사진가. 충실한 일상이 주먹 쥔 다짐보다 중요하다는 걸 자칫 죽을지도 모르는 수술대 위에서 깨달았다. 이후 음악, 미술, 건축과 디자인에 빠져들어 세상의 좋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게 됐다. 살면서 쓰게 되는 물건의 의미와 가치를 헤아리는 일 또한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생각한다. 『심미안 수업』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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