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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로스톤 공원 늑대 소탕 뒤 황폐…‘적’ 있어야 더 나은 생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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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호 16면

자연에서 배우는 생존 이치 

그래픽=양유정 yang.yujeong@joongang.co.kr

그래픽=양유정 yang.yujeong@joongang.co.kr

사람도 없고 포식자도 없는 무인도에 염소 몇 마리를 풀어놓으면 극적인 변화를 볼 수 있다. 위험은 없고 먹을 풀은 천지에 널렸으니 이런 천국이 어디 있겠는가. 전성시대가 시작된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천국은 오래가지 못한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입을 섬이 당해 낼 수 없어서다.

어디서나 그렇듯 비극은 전성의 정점과 함께 온다. 경쟁이 치열해져 내 배부터 채우고 보는 ‘공유지의 비극’ 현상이 심화되면서 섬은 급격히 황폐해진다. 자멸로 직진하는 것이다. 이들은 왜 자멸의 길을 피하지 못할까? 살아온 내력에 이유가 있다. 이들은 지금까지 포식자가 없는 환경에서 살아 본 적이 없다. 항상 포식자들에게 시달려 왔기에 스스로 먹이나 개체 수를 조절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이들의 유전자에도 이에 대한 대비책이 들어 있지 않다.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있지도 않은 일에 왜 귀한 에너지를 쏟겠는가. 진화는 쓸데없는 일에 힘을 들이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때문에 이들에게는 포식자라는 적이 필요하다. 이제는 유명해진 미국 옐로스톤 국립공원의 사례도 마찬가지다. 이곳 사람들은 예전부터 이 지역에 사는 늑대를 철천지원수로 여겨 왔다. 가축을 잡아먹고 사슴 같은 야생동물도 해치는, 도무지 도움이 안 되는 존재였다. 그래서 모조리 소탕해 버렸다. 자, 이제 천국 같은 곳이 되었을까?

오라는 천국은 오지 않고 지옥이 찾아왔다. 늑대가 없어지자 엄청나게 불어난 사슴들이 눈에 보이는 풀들은 물론 어린나무 순까지 모조리 뜯어먹는 바람에 환경이 황폐해졌던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생존 기반을 무너뜨리고 있었지만, 이들은 이런 일을 한 번도 겪은 적이 없어 대처할 줄도 몰랐다. 상황은 공원 측이 늑대를 들여오면서 해결됐다. 포식자 ‘덕분에’ 개체 수가 조절되면서 환경은 정상화되었고 남은 사슴들은 더 건강해졌다. 이들 역시 섬의 염소들처럼 적이 있어야 더 나은 생존이 가능한 역설의 주인공이었다.

양상은 다르지만 우리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적이 있어야만 존재 가능한 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조직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임원이나 최고경영자가 된 사람들이 얼마되지 않아 물러나는 일이 있다. 승승장구한 이력에 어울리지 않게 말이다. 이유야 다양하지만 본질적인 원인을 따라가 보면 ‘적’ 때문일 때가 드물지 않다. 경쟁자 같은 적에게 밀려났다는 걸까? 아니다. 이 적은 우리가 아는 적과 좀 다르다.

이들의 적은 보통 내부에 있다. 경쟁자이거나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른바 자신의 앞길을 막는 사람들이다. 얼핏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상당히 권력지향적인 이들은 이런 사람들을 가만 놔두지 않는다. 단순한 장애물이 아니라 눈엣가시이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없애고자 한다. 적의 존재감이 명확할수록 투지를 불태우는 이들의 특기는 그럴듯한 반대 논리를 통해 상대를 흔드는 것, 이를 통해 자신을 부각시킨다. 입만 열면 조직의 미래를 외치면서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오로지 이기기 위해 조직의 미래에 해가 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조직 동원력을 높이는 데 골몰한다. 덕분에 이기고 또 이긴다.

이 과정에서 부풀어 오른 자아감은 우월감으로 자리를 잡는다. “그들보다 (내가) 낫다”는 게 행동의 기준이 되고, 문제가 생기면 그들 탓으로 돌린다. 항상 그들을 비교 대상으로 삼고, 그들을 탓한다. 이기고서도 적이 있어야 한다. 정당성마저도 말이다. 문제는 꼭대기에 오를수록 대적할 적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외부의 적이야 널렸지만 이들은 내부의 적과 싸우는 게 전문이라 자신이 외부의 적과 싸우기에는 경쟁력이 별로 없다는 걸 잘 안다. 그래서 어떻게든 회피한다. 물론 내부 장악력을 높이는 데는 외부의 적만큼 효과적인 게 없기에 이를 잘 활용한다. 위기 상황을 조성하는 데 이보다 나은 게 어디 있겠는가.

사라져 가는 내부의 적을 만든다. 케케묵은 관습이나 시장 상황 같은 걸 적으로 삼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이런 건 성과 내기가 힘드니 목록에 올리지도 않는다. 눈에 보이는 적이야말로 자신의 힘을 만천하에 내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조직을 개선한다며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고분고분하지 않은 사람들을 적으로 몰고, 자신이 추진했다가 성과가 나지 않으면 희생양을 만들어 적으로 삼는다. 적이 있어야 더 나은 생존이 가능한 옐로스톤의 사슴처럼, 자신의 삶을 사실상 적에게 의존한다. 이러니 시간이 지날수록 조직은 와해되고 수익이 떨어지는 건 당연지사. 희생양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기에 결국 모두의 적이 되어 물러난다.

어떤 과정을 통해 리더가 되었든 공동체를 이끄는 자리에 서면 적을 바꿔야 한다.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공동체의 성장과 미래를 저해하는 것들을 적으로 삼아야 한다. 말 위에서는 정복자가 될 수 있지만, 통치자는 될 수 없다. 통치자가 되려면 적의 개념을 바꿔야 한다. 통치자라는 자리에 걸맞은 적을 찾아야 한다.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araseo11@naver.com
경향신문과 중앙일보 이코노미스트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2005년부터 자연의 생존 전략을 연구하며 지속 가능한 생명력을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지를 탐구하고 있다. 『사장으로 산다는 것』 『사장의 길』 등의 책을 냈고,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서 ‘지식탐정의 호시탐탐’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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