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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씻을 수 없는 상처'란 말, "비겁한 변명" 비판하는 이유[BOOK]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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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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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D 지음
김수정·김영주 감수
동녘

‘씻을 수 없는 상처.’ 성폭력 피해를 묘사할 때 관습적으로 쓰이는 말이다. 피해자가 겪는 고통이 크고 회복이 힘들단 뜻이 담겼다. 하지만 저자는 이 표현을 “정의가 실현되지 않은 상태에 대한 시스템의 책임 회피이자, 피해 회복을 피해자 개인의 몫으로 돌리는 사회의 비겁한 변명”이라고 일갈한다. 성폭력 피해를 ‘씻을 수 없게’ 만드는 게 지금의 사법 절차란 얘기다.

이 책 『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는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수사·재판 절차 매뉴얼이자, 이들의 눈으로 본 한국 사법 시스템 진단이다. '디'(D)란 이름으로 반(反)성폭력 활동을 해온 저자는 지난 8년간 수십 건의 성범죄 사건 피해자들과 직·간접 연대하며 법적 대응을 도왔다. ‘비전문가’지만 전국 법원 방청을 다니고, 논문과 판례를 분석했다. 그렇게 쌓여 이 책에 담긴 경험치는 현직 판사도 “사법 절차 관여자라면 누구라도 밑줄 그어가며 읽어야 한다”며 혀를 내두를 정도다.

저자는 자신이 보고 들은, 또 성폭력 피해자로서 직접 겪은 사건들을 토대로 피해자가 형사사법절차에서 어떻게 소외되는지 지적한다. 법원에선 피해자와 합의를 시도했다는 사실만으로 피고인에게 정상 참작이 되고, 공개 심리에서 증거자료인 성폭력 영상이 아무런 제재 없이 재생되는 식이다. 저자는 교제폭력을 신고한 20대 여성에게 ‘남자친구라며? 좀 봐줘’라며 고소 취하를 유도한 경찰, 검사석에서 졸거나 사건 파악을 못 해 재판부의 질책을 받는 공판 검사를 보며 탄식하기도 한다.

한 발짝 더 나아가, 저자는 사법 시스템 개선을 위한 '사법 감시'의 길을 소개한다. “취약한 피해자와 약자, 소수자일수록 시스템이 제 기능을 발휘하면 피해 회복과 일상 재구성이 앞당겨진다"면서다. 책에는 형사재판 법정 배치도, 판결문을 조회하고 읽는 법 등도 상세히 담겼다.

사회가 손 놓고 있는 동안 피해자들의 곁에 서서 회복을 도운 건 주로 저자와 같은 '연대자들'이었다. 저자가 썼듯 이들의 싸움을 기억할 최소한의 책임이, 우리 사회에는 있다. '피해자에서 생존자, 그리고 감시자가 된 마녀 D의 사법연대기'가 책의 부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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