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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경호의 시선

칩4, 어떻게 할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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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울퉁불퉁 근육질 몸매를 보란 듯이 대외에 과시하는 중국의 전랑(戰狼·늑대)외교를 지켜보는 건 불편하다. 주변에서도 중국 얘기만 나오면 거품을 물고 반중 감정을 쏟아내는 이들이 많다. 한국 기업은 중국의 사드 보복을 당했고, 문재인 정부 당시인 2017년의 ‘사드 3불(不) 입장’을 계승하라는 주권 침해적인 압박까지 받고 있다. 지난 정부의 굴욕적인 대중 외교가 대선 과정에서 이슈가 될 정도로 국민감정은 좋지 않다.

트럼프의 ‘반중 경제블록’ 무산 #가치동맹 좋지만 실익은 지켜야 #기업·산업부 입장 충분히 반영을

 윤석열 정부는 미국 주도의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 참여를 선언했다. IPEF는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 간의 안정적 공급망 구축이 핵심이다. 미국이 제안한 반도체 공급망 동맹인 ‘칩(Chip) 4’ 참여도 고민 중이다. 일본과 대만은 이미 칩4 참여를 결정했다. 반도체 생산을 위해 설계와 장비에 경쟁력이 있는 미국, 소재·원료에 강한 일본과 협력은 의미가 크다. 우리 반도체 주요 수출국인 중국의 반발에도 칩4에서 빠지는 것보다 가입하는 게 낫다는 분석이 많다.

(서울=뉴스1) 오대일 기자 =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1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 강당에서 한미정상회담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2022.5.21/뉴스1

(서울=뉴스1) 오대일 기자 =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1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 강당에서 한미정상회담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2022.5.21/뉴스1

 중국을 바라보는 불편한 시선을 잠시 거두고 냉정하게 현실을 진단할 필요가 있다. 우방국 위주의 핵심 공급망 구축 시도는 몇 년 된 얘기다. 국제 과학기술 학술논문(SCIE) 편수 기준으로 2018년 중국이 처음으로 미국을 추월했다. ‘과학대국’ 중국의 힘이 드러나면서 미국의 대중국 인식이 획기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2020년 ‘반중(反中) 경제 블록’인 ‘경제번영네트워크(EPN)’를 추진한 것도 중국 견제론이 비등해지면서다. 당시 한국 정부에도 공식적으로 EPN 참여를 요청했다. 결과적으로 트럼프의 EPN은 흐지부지됐다. 트럼프 행정부가 대선을 앞둔 정권 말인 것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본질적으로 미국이 한국·호주·인도·일본·뉴질랜드·베트남 등과 함께 중국 없는 공급망을 구축할 능력이 과연 있는지 안팎에서 갸우뚱하는 분위기가 강했던 탓이 컸다. 테슬라와 애플 같은 미국 대기업도 중국 공급망에 의존하고 있는데 자국 기업에는 말도 못하면서 동맹국에 탈(脫) 중국을 강요하는 것은 자국 우선주의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오바마 행정부가 추진했던 환태평양 경제동반자 협정(TPP)으로 중국을 견제할 수 있었는데 트럼프는 2017년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국익을 지키겠다며 의회 비준을 앞둔 TPP 탈퇴를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자국 이익을 위해서라면 EPN도 폐기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지금 미국 정부 누구도 EPN을 말하지 않는다.

 한·미 가치 동맹은 소중하다. 첨단 기술분야 협력을 통해 미래 이익에 도움 되는 새로운 기회의 창이 열릴 수 있다. 하지만 가치 동맹에도 다양한 변주가 있다. 미국·일본·호주와 함께 ‘반(反)중국’ 4개국 안보협의체 쿼드(Quad)를 결성한 인도는 러시아 제재 전선에서 빠졌다. 에너지와 비료 등 주요 자원을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는 데다 중국과의 갈등을 고려할 때 러시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미국이 중국의 통신장비회사 화웨이를 제재할 때 화웨이 5G 장비를 쓰는 한국의 LG유플러스는 미국 압력에 시달렸다. 하지만 끝내 버텨냈다. 독일도 미국 반대를 무릅쓰고 화웨이의 자국 5G 사업 참여를 허용했다.

 올해로 한·중 수교 30년이다. 가장 권위 있는 학술지인 네이처와 사이언스에 중국은 지난해 463편(8%)의 논문을 게재했다. 압도적 1위는 미국(38%)이고 영국(12%), 독일(9%)에 이어 중국은 4위다. 한국은 75편(1%)으로 20위에 그쳤다. 반도체 등 첨단기술 분야에서 미국 주도의 공급망 구축이 이뤄져도 중국은 접근 가능한 차선의 기술을 활용해 판을 뒤엎는 혁신에 나설 수 있다. ‘마이너스 1 기술전략’ 혹은 ‘중국식 적정기술 전략’이다. 핵심 군사무기나 자동차 등 주요 부문에 모두 3나노급 첨단 반도체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한국의 배터리 기술에는 미치지 못한다지만 중국은 혁신을 거듭해 가성비 충만한 배터리로 시장을 장악했다. 중국과 과학기술 협력의 여지는 여전히 많다. (은종학 국민대 교수 분석)

 결국 칩4에 가입해 미래 이익을 선점하되, 현재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중국과의 협력을 유지하는 게 관건이다. 시간을 갖고 협상하면서 차분히 실리를 챙겨야 한다. 화웨이 제재 국면에서도 그랬듯이 미국은 외교안보 라인을 가동해 동맹국을 압박하는 방안을 선호한다. 우리 기업과 산업통상부 입장을 충분히 듣고 협상에 임하는 것이 이에 대처하는 정공법이 될 수 있다. 경제 최우선의 원칙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