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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함과 무지함 사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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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최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최현철 사회디렉터

최현철 사회디렉터

2009년 7월 한국조세연구원 주최로 ‘외부불경제 품목 소비억제를 위한 정책토론회’가 열렸다. 이름은 거창한데 사실 술·담배에 붙는 세금을 올리자는 의견을 띄우는 자리였다. 이명박 정부로선 이 세금을 올리고 싶은 유인이 컸다. 이날 토론회에선 흡연과 음주의 사회적 비용이 한해 24조원에 이른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시민이 건강해지고, 건강보험 등 정부가 떠안아야 할 부담도 줄어드니 명분이 좋았다. 부자 감세에 따른 세수 감소와 4대강 사업 등 대규모 국책 건설사업 때문에 늘어난 재정적자를 줄이는 것은 덤이었다.

명분과 실리를 다 갖췄지만 당시 정부는 곧바로 밀어붙이지 않았다. 국책연구소를 통해 필요성을 제기하고, 그에 따른 반응을 살폈다. 부정적 목소리가 훨씬 컸다. 정부는 건강세라는데 여론은 죄악세라는 험악한 이름을 붙이며 반대했다. 결국 그해 세제개편안에서 소위 죄악세는 빠졌다. 담뱃세는 2014년, 주세는 2019년에야 바뀌었다. 그나마 맥주와 막걸리만 적용했고, 서민 술이라는 소주는 그때나 지금이나 72% 그대로다.

로스쿨 도입까지 25년간 논의
사회적 합의에 등돌린 문 정부
현 정부는 대체 무엇을 배웠나

2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학제개편안 관련 학부모단체간담회에서 학부모를 달래는 박순애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오른쪽). [연합뉴스]

2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학제개편안 관련 학부모단체간담회에서 학부모를 달래는 박순애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오른쪽). [연합뉴스]

도입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 정책으로는 로스쿨을 빼놓을 수 없다. 김영삼 정부가 처음 검토하기 시작했지만 당시엔 장기 과제로 넘겼다. 김대중 정부의 사법개혁추진위원회(사개추)에서도 수용되지 못한 이 방안은 노무현 정부 들어서야 본격 추진됐다. 하지만 결실을 보기까지 쉽지 않은 길이었다. 2003년 7월 대법원 주최로 첫 공개토론회를 열어 논의를 시작한 이후, 법무부 수용까지 1년, 대학원 주무부처인 교육부가 수용해 로스쿨법을 제출하기까지 다시 1년, 그 법안이 통과되기까지 2년이 걸렸고 실제 개원은 2009년 3월에야 이뤄졌다.

문재인 정부는 독특한 사회적 합의 방식을 꺼냈다. 이름도 생소한 공론화위원회다. 사회적 의견이 엇갈리는 중요 정책을 국민이 토론과 여론조사 등을 포함한 숙의 과정을 거쳐 결정하는 방식이다. 당시 정부는 문 대통령 공약대로 신규원전 건설 중단, 월성 1호기를 비롯한 노후원전 가동 연한 연장 불허 등 탈원정 정책을 밀어붙였다. 문제는 이미 공정률이 29%나 됐던 신고리 5, 6호기였다. 신규 원전이라고 하기에도, 아니라고 하기에도 모호한 상황이어서 반대는 더 심했다.

결국 새로운 방식으로 사회적 합의를 이루기로 하고 2017년 7월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장에 진보 성향 대법관 출신인 김지형 변호사를 임명했다. 건설 중단 결론을 내기 위한 요식 행위라는 의심도 컸다. 하지만 웬걸. 석 달간 숙의를 거친 위원회는 59.5%의 찬성으로 공사를 재개하라는 권고를 냈다. 정부로선 속이 쓰렸겠지만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해가 첨예하게 맞서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사회적 합의를 이루기는 쉽지 않다. 20년 넘는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때론 반대파 의견을 수용하느라 정책의 골격이 바뀌기도 한다. 도중에 반대 의견에 밀려 뜻을 접을 수도 있고, 막판에 표결에서 뒤집어질 수도 있다. 사회적 합의는 그만큼 더디고 어렵다. 하지만 이 과정을 참아 내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문재인 정부 후반기 모습이 생생하게 보여준다.

신고리 5, 6호기에서 쓴맛을 본 문재인 정부는 1주일 뒤 탈원전 로드맵을 발표하면서 월성1호기 조기 폐쇄 카드를 꺼냈다. 2012년 설계수명 30년이 끝난 뒤 10년 연장 승인이 난 만큼 4년만 기다리면 자동폐쇄될 곳이었다. 하지만 임기 전 한 방이 필요했다. 논리적 근거를 대기 위해 공무원들이 안전성 평가를 조작했다가 들통났다. 공무원 여럿이 구속됐고, 장관까지 재판을 받고 있다.

검수완박(검찰수사권 완전 박탈)도 마찬가지다. 180석 가까운 거대 여당이 사회적 합의를 외면하고 문 정권 내 통과를 위해 회기 쪼개기, 위장탈당 등 온갖 꼼수를 동원했다. 그 결과 정권을 뺏겼고 지방 권력도 내줬다. 마침내!

최근 취학연령 1년 하향 문제로 온 나라가 들끓고 있다. 30만 명 안팎의 취학 연령기 아동을 둔 가족뿐 아니라 예비 부모, 조부모까지 고려하면 전 국민의 관심사다. 한 해 모집정원 2000명, 변호사 시험 합격자 1712명(2021년 기준)인 로스쿨과 비교도 안 된다. 그런데도 선거공약도 아니고 국정과제에도 포함되지 않은 내용이 공청회 한 번 없이 교육부 업무보고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얼마 전까지는 행정안전부 휘하에 경찰국을 두는 문제로 시끄러웠다. 당사자인 경찰과 국민 모두 반대 의견이 더 많았지만 법 개정도 아닌 시행령으로 밀어붙였다. 전 정부처럼 하지 말라고 뽑아줬더니 하는 모양새가 똑같다. 무심한 것인지, 무지한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