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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선배 일 좀 하게 해라"…세대갈등 번진 금융권 '임피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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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피크제 선배 일 좀 하게 해주세요."

한 국책은행 노조위원장이 자주 받는 젊은 노조원들의 민원이다. 그는 "교육을 가면 가장 많이 듣는 민원이 임금피크제(임피제) 관련 세대 갈등"이라며 "아예 임피제 선배를 부서에서 빼달라고 투서를 넣는 조합원도 있다"고 토로했다.

임피제가 금융계의 뜨거운 감자가 됐다. 이미 세대 갈등의 불씨가 된 데다, 지난 5월 대법원의 판결로 임피제 직원의 업무를 줄여야 한다는 방어적인 해석이 나오면서다. 게다가 임피제적용자들이 임금 반환 소송에 속속 나서면서 상황은 더 복잡하게 돌아가게 됐다. 실제로 KB국민은행 노조가 4일 대법원 판결 이후 금융권 최초로 임금피크제 무효를 주장하며 삭감한 임금 반환 청구 소송에 나섰다.

지난 5월 대법원은 "합리적 이유 없이 연령만을 이유로 직원의 임금을 삭감하는 임금피크제는 무효"라는 취지로 판결했다. 판결에서 주목받은 지점은 임금을 합법적으로 삭감하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수준의 업무량과 강도의 저감이 수반돼야 한다는 것이다.

금융권이 임피제 판결 후폭풍에 휘말린 건, 다른 업종에 비해 임피제를 가장 앞서 도입한 데다 그 비율도 높아서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금융업 분야 사업장 3만1533곳 중 임피제를 도입한 곳(2만1187개)은 전체의 67.2%에 달한다. 국내 전체기업 중 임피제 도입 기업 비율이 22% 정도인 것과 비교하면 차이가 크다.

KB국민은행 노조가 4일 서울 여의도 국민은행 신관 앞에서 ‘불법적 임금피크제 규탄 및 피해 노동자 집단소송 제기’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KB국민은행 노조가 4일 서울 여의도 국민은행 신관 앞에서 ‘불법적 임금피크제 규탄 및 피해 노동자 집단소송 제기’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국민은행 노조, 임피제 판결 이후 첫 임금 반환 소송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KB국민은행 노조는 4일 임피제 무효를 주장하며 삭감한 임금 반환 청구 소송에 나섰다. 대법 판결 이후 금융권 최초다. 류제강 국민은행 노조위원장은 “임피제 적용 전과 같은 업무를 하는 데도 임금만 절반가량 깎인 직원 중 근거를 확보한 이들을 중심으로 1차 소송을 제기한다”며 “자료를 확보하는 대로 2차 소송도 낼 것”이라고 말했다. 집단 소송에는 직원 40명이 참여한다.

우리은행 노조도 콜센터 직원 등을 중심으로 임금은 깎였지만 동일한 업무를 맡고 있어 위법 요소가 있는 사례를 모으고 있다. 우리은행 노조 측은 “여름휴가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조사할 예정”이라며 “회사와 협의를 해보고, 불발될 경우 노조가 소송을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증권사에도 최근 임피제 관련 최고장 접수가 이어지고 있다. 최고장은 소송 전 이뤄지는 사전 고지 제도다. 김기종 사무금융연맹 증권업종본부 본부장은 “최근 한 증권사에서만 60건가량의 최고장 접수가 이뤄졌다”며 “다른 6개 증권사 직원도 최고장을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몇달 안에 증권사를 상대로 한 임피제 줄소송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임피제 선배 일 좀 하게 해라"…세대 갈등도 심각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임피제와 관련한 소송과 갈등이 더 심각한 곳은 국책은행이다. 명예퇴직이 활발한 시중은행과 달리 고령 인력 상당수가 임피제를 적용받고 있어서다. 국책은행의 경우 명예퇴직을 하면 임피제 잔여기간 급여의 22.5%만 지급한다.

명예퇴직할 유인이 부족하다 보니 국책은행의 임피제 적용 직원은 매년 늘어나고 있다. 2021년 말 기준 전체 직원 중 임피제 적용 인원 비율이 산업은행 8.9%, 기업은행 7.1%, 수출입은행 3.3%다. 산업은행의 경우 약 열 명 중 한 명이 임피제 적용 직원인 셈이다.

임피제 적용 직원이 늘며 세대 갈등도 심각해지고 있다. 임피제 직원은 임금 삭감을 위해 후선 업무로 배치된다. 사실상 유휴 인력 성격이 강하다.

문제는 국책은행에 적용되는 정부의 정원 통제다. 기존 인력이 퇴직하지 않으면 신규 직원을 뽑을 수가 없다. 임피제 인원이 많아지면 다른 근로자의 업무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한 국책은행 노조위원장은 "임피제 적용자는 '고려장에 처해졌다'며 서러워하고, 젊은 직원들은 임피제 선배들이 일은 안 하는데 정원만 차지한다며 불만이 크다"고 말했다.

이미 임피제 관련 소송도 여러 건 진행 중이다. 산업은행 시니어 노조 조합원 169명은 2019년 6억원대 임금 삭감분 반환 소송을 냈다. 지난해 4월 1심에서 패소한 뒤 항소했다. 기업은행 퇴직자 470명도 깎인 임금 240억원을 반환해달라는 소송을 내 현재 1심 진행 중이다.

박지순 고려대 노동대학원 법학 교수는 ”연공서열식 호봉제가 주를 이루는 은행권에서 급증하는 인력 비용과 고령화한 인력을 임피제라는 미봉책으로 막으려 했지만 대법 판결로 이런 방식이 더는 불가능해졌다“이라며 ”임피제 수정이나 재취업제도(아웃플레이스먼트), 임금 체계 개편 등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금융노조, 6년 만에 총파업 만지작

한편 금융노조는 다음 달 6년 만에 총파업에 나설 채비 중이다. 파업의 핵심 쟁점은 임금 인상률이지만, 영업점 폐지 금지와 주 4.5일제 도입 등과 함께 임피제도 협상 테이블에 오를 전망이다. 올해는 금융노조가 임금교섭과 함께 단체협약 개정도 진행하는 해다. 이를 위해 금융노조는 오는 19일 조합원 대상 쟁의행위 찬반 투표에 돌입한다.

금융노조 측은 "투표 통과는 어렵지 않아 보인다"며 사실상 파업을 예상하는 분위기다. 현재 다음 달 16일 1차 총파업, 다음 달 30일 2차 총파업이 예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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