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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 합정동 원룸이 운명처럼 느껴졌던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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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 최창연의 원룸일기(2)

고잉 홈 (Going Home)

일요일 아침이 되면, 구수하고 묵직한 냄새가 창문을 통해 들어온다. 처음엔 누가 집에서 밥을 태우나 싶어서 두리번거렸는데, 나중에 그것이 커피콩을 볶는 냄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처음 합정동 집을 보러 왔을 때, 이전 세입자가 ‘맛있는 카페가 바로 옆에 있어요’라며 알려 주었다. 이렇게 맛있는 카페가 콩 볶는 냄새가 날 정도로 가까이에 있다니. 게다가 알고 보니 그 카페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이 글을 쓰러 자주 오시는 곳이기도 했다. 이 집에서 살게 된 것이 운명처럼 느껴졌다. 운명이라는 거창한 표현을 쓰는 이유는, 처음으로 서울에서 ‘집’이라는 공간이 생겼다고 느꼈기 때문이리라.

처음으로 ‘집’으로 느껴진 공간  

이상하게도 신림동에서 살 때는 이곳이 내 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밤이 되면 골목길이 어둡고 인적도 없는 데다가, 겨울에는 음지에 땅이 얼어있어서 조심조심 걸어야 했다. 여름날 도로 아래 흐르는 복개천을 걸으면 쿰쿰한 냄새가 났다.

주택을 허물고 칸칸이 좁게 나누어 올린 건물은, 더 이상 집이 아니다. 차들이 지나가는 길을 메워 도로 아래 만든 길은, 더 이상 길이 아니다. 노량진이나 신림동 원룸의 작은 창을 떠올리면, 처음 서울로 올라온 앳된 친구들 얼굴이 함께 떠오른다. 우리의 표정은 간이 정거장에 서 있는 사람 같았다. 들떠 있고, 약간 초조해 보였다. 서울에서 우리가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을까? 가끔 아파트 베란다들을 바라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었다.

합정동으로 이사 와서 가장 좋았던 것은, 비로소 내 것이라고 느끼는 공간이 생겼다는 것이다. 나의 퇴근길은 토정로를 지나오는데, 양화진 성지공원에서 당인리 발전소까지 이어지는 길이 ‘토정로’이다. 양쪽으로 가로수가 가득한 길에 동네 서점과 멋스러운 빈티지 가게, 작고 오래된 밥집과 할머니가 혼자 운영하시는 미용실이 있다. 작고 아름다운 가게들을 쭉 지나다 다다르는 곳이 토정로의 터줏대감인 ‘커피발전소’이다. 큰 간판 없이 낮게 세워진 입간판이 전부인 곳, 그래서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보아야만 발견할 수 있는 조용한 카페. 나는 그곳이 나의 공간이라고 느끼고는 했다.

커피발전소에 가면 늘 제대로 된 카푸치노를 마실 수 있다. 받침이 있는 두꺼운 커피잔에 우유 거품이 푹신하게 올려져 나오는 카푸치노. 낡은 테이블 위에는 늘 새로운 신간과 문학 잡지가 올려져 있다. 사장님의 취향이 담긴 방대한 장서에서 나는 책 냄새. 조용히 대화하거나 글을 쓰는 사람들, 가끔 문이 흔들리며 내는 소리를 들으며 앉아있으면 창밖으로 시간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내가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를, 여러 날을 앉아있고야 알게 되었다. 나는 이런 거실이 갖고 싶었다는걸.

여러 가지로 편한 점도 많지만, 원룸이라는 공간이 아쉬운 이유 중 하는 거실이 없다는 점이다. 원룸에는 잠을 자는 공간과 일하러 나서는 현관 사이에 공간이 없었다. 큰 창문으로 계절을 느끼며 하루를 곱씹어 볼 수 있는 소파도 없었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부는 날처럼, 계절을 느끼고 싶을 땐 나는 커피발전소로 간다. 마치 거실 소파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기분으로, 나는 이곳에 앉아 몸에 힘을 푼다. 직장에서 하루 종일 긴장해 있던 눈썹과 입꼬리에 힘을 빼고, 아무 표정도 없이 말간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는다. 두꺼운 잔에 담겨 나오는 카푸치노를 마신다. 깊게 숨을 쉰다.

좋은 공간은, 우리에게 행복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곳에서 나는 삶에서 많은 것은 소유하지 않고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 냄새를 좋아하고, 넓은 테이블을 좋아하고, 받침이 있는 잔에 마시는 커피를 좋아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나 자신이 된다고 느끼는 공간이 있다면 ‘집’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림 최창연]

[그림 최창연]

굿바이 ‘나의 거실’ 

토정로를 12년간 지켜온 커피발전소는, 작년 11월에 문을 닫았다. 수많은 책들이 조금씩 사라지고, 마침내 낡은 테이블과 소파만 남은 날, 카페에 앉아 마지막 카푸치노를 마셨다. 몇 명이나 ‘난 이제 어디로 가야 해요?’라고 물어보는 소리를 들었다. 나만 이곳을 ‘나의 거실’이라고 느낀 것은 아닌 모양이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이곳에서 보았던 행복의 모습을 내 주변에서 만들어내고 싶다.

내 소유가 아니었던 공간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며 아꼈듯이, 이제는 세상에 없는 커피발전소를 나는 여전히 좋아한다. 무척 과묵한 사장님이 어딘가에서 다시 커피를 내리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곳에도 책이 많았으면 좋겠고, 오래된 테이블이 있었으면 좋겠다. 누군가가 초조하고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긴장을 풀고 그 앞에 앉아 조용히 커피를 마시고 있기를. 그는 나와 표정이 아주 비슷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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