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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퉁퉁 부은 얼굴로 저주 퍼붓는다"…前 '푸틴 후계자'의 분노

중앙일보

입력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이 지난 5월 9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전승절 행사에 참석했다. 로이터=연합뉴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이 지난 5월 9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전승절 행사에 참석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치매 노인.” 

“유럽연합(EU) 지도부는 미치광이.” 

“러시아는 조만간 지도에서 우크라이나를 사라지게 할 것이다.”

가디언은 1일(현지시간) “러시아 대통령과 총리를 지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57)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의 눈으로 보는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한다”며 최근 그의 이같은 발언들을 소개했다. ‘최신 IT 기기와 팝 음악을 사랑하는 자유주의자에서 대량학살을 옹호하는 우월주의자로’. 2008년 대통령 취임 이후 메드베데프 부의장의 정치 여정은 이렇게 정리된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이 지난 3월 16일 통합러시아당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이 지난 3월 16일 통합러시아당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메드베데프 부의장은 최근엔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이렇게 썼다. “사람들은 나에게 (발언이) 왜 이렇게 과격하냐고 묻는다. 이렇게 대답하겠다. 나는 그들을 싫어한다. 그들은 짐승들이고 타락했다. 그들은 우리 러시아가 죽기를 바란다. 그리고 내가 살아있는 한, 나는 그들을 사라지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하겠다.” 다만 그는 ‘그들’이 우크라이나인지, 서구의 정치인들인지, 둘 다인지 명시하지는 않았다.

“외모까지 변화, 눈빛 번득여” 

이는 친근하고 자유분방했던 대통령 재임 시절과는 사뭇 다르다. 인터넷 문외한으로 알려진 전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과는 달리 그는 과거 실리콘밸리를 방문해 애플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와 인증 사진을 찍고 한국에서 선물 받은 삼성전자의 갤럭시탭 후기를 올리는 등 IT 기기와 인터넷에 관심이 컸다. 트위터 글도 거의 매일 올리다시피 했다. 공연과 사진에도 관심이 많다. 록 음악 팬인 그는 엘튼 존 공연도 다녀오고 직접 찍은 사진 전시회도 수차례 열었다.

메드베데프의 변화는 언행에만 그치지 않는다. 가디언은 “그의 외모는 사상 만큼이나 크게 달라졌다”고 주목했다. “10년 전 그는 소년 같은 외모에 말끔한 수트 차림으로 국가를 이끄는 매력적인 지도자였지만, 이제는 지저분하고 퉁퉁 부은 얼굴에 번득이는 눈빛으로 서구사회를 향해 저주를 퍼붓고 있다”고 혹평했다.

“상황 암담한 데 정치 계속 시도”

이를 두고 가디언은 “메드베데프의 재부팅된 페르소나는 대통령 퇴임 이후 10년간 부닥친 암담한 상황에서 정치를 계속하기 위한 명분을 찾으려는 필사적인 시도”라고 분석했다. 러시아 야당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의 측근 마리아 페브치크는 지난 5월 한 토론회에서 메드베데프에 대해 “스스로 무의미하고 한심하다고 느낄 때 자신을 재창조하려고 노력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메드베데프는 이발하거나 체육관에서 운동할 수도 있었지만, 그 대신 그는 ‘매’(hawkㆍ강경파)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꼬집었다.

2012년 3월 4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왼쪽)가 대선에 다시 나섰다. 오른쪽은 대통령 연임을 하지 않고 푸틴을 지지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 AFP=연합뉴스

2012년 3월 4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왼쪽)가 대선에 다시 나섰다. 오른쪽은 대통령 연임을 하지 않고 푸틴을 지지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 AFP=연합뉴스

메드베데프는 푸틴의 지명을 받아 2008년 압도적인 지지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푸틴의 후계자였지만, 사법부의 독립성을 강화하는 사법개혁에 나서는 등 푸틴과는 차별화된 행보를 보였다. 종종 푸틴과 정치적 반대 입장을 표명하며 민주 진영에선 자연스럽게 그의 재선에 대한 기대감도 커졌다. 러시아 독립언론 ‘TV레인’ 설립자인 나탈리아 신데예바는 “그는 진정한 자유주의자였다”며 “단순한 정치적 전략이 아니라 진심으로 정상적이고 문명화 된 국가의 대통령이 되고 싶어 했다”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직 복귀 후 밀려나

그는 그러나 푸틴이 2011년 여름 낚시 여행에서 그에게 자신의 대통령 복귀를 통보했을 때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대통령과 총리직을 맞바꾸는 조건이었다. 크렘린궁 고문 출신 글렙 파블로프스키는 “메드베데프는 (푸틴에게 대적할) 능력이 없었다”고 했다. 푸틴은 이후 메드베데프에게 여당 대표직을 맡기고 그의 측근들을 내쳤다. 가디언은 “(여당 대표 자리는) 푸틴이 ‘차르(러시아 황제)’로 받을 비난을 대신 받아주는 방패막이이자 독이 든 성배”라고 했다. 파블로프스키 역시 “메드베데프는 푸틴에게 원하는 것을 줬지만, 푸틴은 그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후 메드베데프는 공개 석상에서도 굴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개막식을 비롯해 푸틴의 국정연설 등 공식 석상에서 꾸벅꾸벅 조는 모습이 카메라에 수차례 포착됐고, 메드베데프가 알코올 중독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러시아는 안팎에서 경직돼 갔다. 푸틴이 2014년 크림반도 합병에 나선 이후 러시아 정부는 권위주의를 강화했다. 메드베데프가 애용했던 트위터는 올해 초 러시아에서 금지됐고, 그가 지지했던 독립언론 TV레인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방송 중단 사태를 맞았다. 메드베데프와 가까운 한 소식통은 “그가 최근에 보인 변화는 결국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은 러시아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분노”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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