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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업의 도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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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장강명 소설가

장강명 소설가

소설을 쓰는 일은 혼자 하는 작업이지만, 책을 펴내는 일은 그렇지 않다. 원고가 저절로 종이에 찍히고 제본되어 서점으로 날아가지는 않으니까. 제작과 유통 단계에서 수많은 사람이 간여해야 겨우 책이 만들어진다. 사실 출판만큼 작고 잘게 분업화된 분야도 흔치 않을 거다.

그런데 정작 글을 쓰는 작가는 그 사실을 어렴풋이만 안다. 부분적으로는 저자를 떠받드는 출판계 분위기 때문인 것 같다. 많은 경우 편집자들이 저자의 대리인처럼 일한다. 작가가 표지에 대해 뭔가를 궁금해한다, 그러면 편집자가 디자이너에게 질문을 전하고 답을 받아 다시 저자에게 설명하는 식이다. 작가는 끝내 디자이너가 누군지도 모른다.

스타트업이 애용하는 ‘협업툴’ 앱
업무 목표·진행과정 손쉽게 공유
한국정치는 왜 마냥 제자리일까

부분적으로는 출판계가 영세하고 기술 인프라가 낙후되어 있어서 그렇기도 하다. 아직도 상당수 출판사가 교정지와 계약서를 종이에 인쇄해서 저자에게 퀵서비스로 보낸다. 편집자가 교정을 마쳐야 저자가 그걸 볼 수 있는데, 협업한다기보다 ‘상대의 건의를 내가 승인한다’는 기분이 들게 되는 순서다.

저자, 편집자, 외주 교정자가 원고를 클라우드 기술로 공유해서 작업하면 시간도 줄이고 논의의 밀도도 높일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국내 출판계는 그럴 투자 여력이 없어 뵈므로, 가진 기술이라도 요령 있게 쓰려 한다. e메일을 쓸 때는 최종 담당자의 계정 주소를 물어 그에게 발송하되 참조인을 여럿 둔다. 그래야 중간에 있는 사람들이 고생을 덜 하고, 내 의견도 명확히 전달된다.

아내가 지난해 지인들과 함께 스타트업을 창업했다. 나도 한 발 걸치고 있어서 작업 과정을 간혹 들여다보는데, 아내와 개발자들 사이의 업무 효율이 경이롭다. 가장 큰 이유는 목표가 늘 분명하고 상세해서이고, 두 번째로는 그들이 사용하는 도구 덕분인 것 같다. 요즘 젊은 기업에서는 ‘협업 툴’이라는 앱들이 일반화했다는 사실도 그렇게 알게 됐다.

전 세계 협업 툴 시장 규모가 이미 지난해 기준으로 60조원에 가깝다고 한다. 아내는 트렐로라는 앱을 쓴다. 커다란 보드판에 주제별로 열을 정한 뒤 포스트잇을 줄줄이 아래로 달아나가는 모양처럼 생겼다.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디자인이 직관적이고 사용법이 단순하다.

트렐로를 사용하다 보면 프로젝트 관리가 저절로 잘된다. 해결해야 할 이슈를 세부 작업으로 쪼개고, 우선순위를 매기고, 단계별로 관련된 사람들이 바로 그 사안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무슨 작업이 진척이 느린지, 어느 팀원이 곤란을 겪고 있는지, 모든 사람이 금방 파악할 수 있다.

트렐로를 옆에서 보며 어떤 협업 툴을 쓰느냐가 리더십만큼이나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더가 분명하고 상세하게 비전을 보여주고 꼼꼼히 관리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런데 그게 여의치 않으면 그런 틀을 요구하는 문법 위에서 일하는 것도 방법이다. 적어도 헛발질과 주도권 싸움은 막을 수 있게 해준다.

대통령과 여당 원내대표가 주고받은 메시지 공개 파문이 시간이 지나도 가라앉지 않는다. ‘내부 총질’ 같은 표현은 인식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나는 그들이 텔레그램으로 소통한다는 사실도 실망스러웠다. 조선시대 왕이 신하에게 비밀스럽게 보낸 어찰(御札) 같았다. 대통령이 원내대표에게 뜻을 전하면 원내대표가 그걸 다시 국회의원들에게 몰래 알리는 구조일까.

‘대통령님의 뜻을 잘 받들어 당정이 하나 되는 모습을 보이겠습니다.’ 여당 원내대표의 답신을 보며 실제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무척 답답했을 것 같다. 대통령의 뜻 자체가 그다지 분명하고 상세해 뵈지 않으니. 선거 때도 그랬고, 얼마 전 120대 국정과제를 확정했을 때도 그랬다. 해결해야 할 이슈를 세부 작업으로 쪼개고, 우선순위를 매기는 일이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았다고 느낀다.

그러다 보니 미래 비전과 로드맵이 아니라 어제와 오늘의 현안에 정국이 갇혀 있다. 헛발질과 주도권 싸움이 또 다른 헛발질과 주도권 싸움으로 이어진다. ‘스타 장관’이 나오면 해결될 문제일까. 요즘 세상에 정치인이나 고위 관료가 스타가 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언론 앞에서 적과 싸우는 건데.

이런 상황이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닐 것이다. 한국 정치의 문법 자체가 기괴하게 고정되는 듯하다. 모든 플레이어가 다른 플레이어를 협업의 대상이 아니라 정적, 경쟁자, 혹은 내부 저격자로 인식하게 되는, 혹은 그런 인식을 지닌 이들만 승리하게 되는 기이한 틀 같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어떤 모습으로 새 협업 툴을 상상해야 할까.

장강명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