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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생각하지 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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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전수진 기자 중앙일보 팀장
전수진 투데이·피플 팀장

전수진 투데이·피플 팀장

에비스가, 기린이, 산토리가 돌아왔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다면 당신은 일본 맥주 매니아일 가능성 100%. 일명 ‘노 재팬(No Japan)’ 파고에 국내 편의점에서 자취를 감췄던 일본 맥주들이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귀환 중이다. 일본 브랜드는 먹지도 마시지도 입지도 타지도 않겠다며 분연히 떨쳐일어났던 것이 3년 전이던가. 어제 귀갓길 동네 편의점 매대엔 모 일본 맥주 전용 유리잔 증정 판촉행사가 절찬리 진행 중이었다. 관세청에 따르면 국내 일본 맥주 총 수입액은 ‘노 재팬’ 시기 90% 이상 급감했으나 올해 1분기 수입액은 약 35억원. 지난해 동기 대비 22.6% 증가했다. 숫자는 정직하다.

2019년 ‘노 재팬’ 운동 당시 퇴출됐던 일본 맥주들. [연합뉴스]

2019년 ‘노 재팬’ 운동 당시 퇴출됐던 일본 맥주들. [연합뉴스]

그러고 보면, 노 재팬 운동이 바람 빠진 풍선 신세가 된 건 오래전 아닌가. 돈이 있어도 정보력과 발품 없으면 못 산다는 포켓몬빵 역시 일본 캐릭터 기반 상품이다. 한 신용카드 회사가 지난 5~6월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선 “1년 내 해외여행을 떠날 것”이라는 응답이 59%였는데, 이들 중 20.5%가 행선지로 일본을 꼽았다고 한다. 사실,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누군가의 자유를 제한하는 방식은 통하지 않는 게 순리이긴 하다.

지난 1일 국내 편의점에 다시 입고돼 소비자 선택을 기다리는 일본 맥주들. 전수진 기자

지난 1일 국내 편의점에 다시 입고돼 소비자 선택을 기다리는 일본 맥주들. 전수진 기자

민족에 빛이 돌아온(光復) 뜻깊은 기념일, 광복절이 코앞인 지금, ‘노 재팬’ 운동의 초라한 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명 ‘국뽕’ 반일감정 유튜브 클릭 수로 먹고 살고, 표심을 자극하던 이들은 목소리 큰 소수가 아니었을까. 이들을 키운 건 팔할이 지난 정부의 ‘죽창가’다. 정권 중후반까지 국내 정치적 필요에 의해 외교를 희생했던 반일 감정 정치의 공명은 컸다. 지일(知日)과 용일(用日)은 친일(親日)의 동의어로 왜곡됐고, ‘토착 왜구’ 악플·악메일은 일상이 됐다.

미국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가 2008년 쓴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제목을 들으면 바로 코끼리를 떠올리게 된다. 프레임의 힘이다. 레이코프는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상징이 코끼리)에 빗대어 글을 썼으나, 그의 논지는 반일 프레임의 진화 필요성과도 통한다. 다른 어디도 아닌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 반일 프레임을 전면 진화시켜야 할 때다. 반일 정치의 유통기간은 다해가고 있다. 일본도 예전의 일본이 아니다. 과거사는 확실히 정리하되, 성숙한 관계로 한·일관계의 진정한 시즌2를 준비해 나가야 할 시점이다. 쉬이 발화하는 반일 감정에 기대는 정치의 유혹에 넘어간다면 역사는 비극에 이어 희극으로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 앞에 ‘고(故)’라는 글자가 붙게 된 지금, 윤석열 정부의 국익 외교는 중요한 시험대에 서있다. 광복절 축사,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