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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입김, 그게 규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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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창규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김창규 경제에디터

김창규 경제에디터

지난 5월 윤석열 대통령 취임한 지 2주일가량 지나자 대기업이 일제히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이때 10개 그룹이 발표한 투자금액만 1000조원을 넘어선다. 그것도 한 기업만 빼고는 모두 대통령의 임기와 같은 향후 5년간 투자계획이 담겨 있다. 재계가 5년 투자 계획을 발표하는 건 이례적이다. 경영 상황이 수시로 바뀌기 때문에 대부분 장기 투자 계획을 구체적으로 외부에 공표하지 않는다. 내부적으로 미래 청사진을 갖고 운용할 뿐이다. 그래서 보통 1년 단위로 구체적 투자계획만 발표하곤 한다.

당시 경영 시계(視界)도 불투명했다. 2월 24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진 후 세계 경제는 흔들렸고 물가는 들썩였다. 지난 3월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발표한 500대 기업의 2022년 투자계획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 기업의 절반 이상(50.5%)이 올해 투자계획이 없거나(12.4%), 아직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38.1%)고 응답할 정도였다. 대규모 투자는 기업의 명운을 좌우한다. 그래서 투자계획을 짤 때는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그런데도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이 경쟁적으로 5년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급히 투자계획을 마련하느라 골머리를 앓았다”고 했다. 이들 대기업이 알아서 눈치를 본 걸까,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 걸까.

새 정부, 과감한 규제 철폐 선언
경제 현장에선 ‘요청사항’ 많아
‘보이지 않는 규제’도 부작용 커
자유와 시장의 의미 되새겨야

지난 6월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은행장과 취임 후 첫 간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은행의 ‘이자 장사’를 비판했다. 그는 “금리는 시장에서 자율적으로 결정되고 있지만, 금리 상승기에는 예대금리차가 확대되는 경향이 있어 은행의 지나친 이익 추구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관치금융 논란이 일자 이 원장은 “시장의 자율적인 금리 조정 메커니즘에 간섭할 의사도 없고, 간섭할 수도 없다”면서도 “다만 헌법·은행법 등에서 은행의 공공적인 기능을 규정하고 있고 이를 기초해 금융감독당국이 의견을 주고받는 것”이라고 밝혔다. 숨죽이고 있던 은행은 발 빠르게 반응했다.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금리 상승기인데도 우대금리 확대 등의 방식으로 대출금리를 경쟁적으로 낮추기 시작했다. 대신 예·적금 금리는 속속 올렸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최근 대출 금리 인하를 자발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지난 7월에는 금융위원회가 오는 9월 말 종료될 예정인 소상공인에 대한 대출만기 연장이나 상환유예를 재연장하겠다고 발표했다. 여기에는 금융회사가 소상공인 대출에 대해 부실 위험을 파악한 뒤 이들의 90~95%를 ‘자율적으로’ 만기연장·상환유예 해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은행권에선 정부가 자율이라는 표현을 했지만 사실상 정부가 지어야 할 부담을 금융회사에 강제로 떠넘기고 있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윤석열 정부는 기업과 시장을 옥죄는 규제를 과감히 철폐하겠다고 공언하며 출범했다. 정부는 규제혁신을 범정부 어젠다로 격상하고 모든 경제부처가 참여하는 ‘경제규제혁신태스크포스(TF)’를 발족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최근 “규제혁신은 한두 번의 이벤트로 끝낼 문제가 아니라 5년 내내 추진해야 하는 국가의 미래가 달린 시대적 과제”라고 했다.

하지만 현장에선 정부의 ‘요청’이나 구두개입이 예전과 다를 바 없다고 울상이다. 겉으로는 규제를 없애거나 완화한다고 하지만 실제 시행할 때는 보이지 않는 입김에 좌우된다는 말이다. 추 부총리도 대기업 경영진에게 과도한 임금 인상을 자제해 달라고 말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서슬 퍼런 정부의 ‘요청’을 단순한 요청으로 받아들일 기업이 누가 있겠는가. 정부의 보이지 않는 입김이나 요청은 제도화되지 않았을 뿐 규제와 똑같이 기업에 피해를 준다.

“기업이 정부가 원하는 때에 투자하고 국내외에서 우수 인재를 영입하려 해도 정부 눈치를 보며 임금을 올리지 못한다. 은행은 기준금리가 올라도 이익이 과도하다는 정부의 호통에 대출금리를 낮춘다.” 이런 게 시장경제의 모습은 아니다. 투자 등이 실패했을 때 책임은 누가 지는가. 물론 요즘 같은 시기에 민관이 합심해서 어려움을 돌파해 나가야 하는 건 맞다. 하지만 어렵다는 이유로 ‘보이지 않는 규제’를 남발한다면 오히려 더 큰 부작용만 낳을 뿐이다. 문제가 있다면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지난 3월 10일 대통령 당선 인사에서 당시 윤석열 당선인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바로 세워 위기를 극복하고 통합과 번영의 시대를 열겠다”고 했다. 정책 당국자는 이때의 자유와 시장에 대한 다짐을 다시 한번 새기길 바란다.